바이킹이 타던 '롱십'을 복원한 배예요. /게티이미지코리아

지난 12일 유럽축구선수권대회가 끝났어요. 이탈리아가 우승을 차지했지만, 대회 내내 최고의 드라마를 보여준 건 덴마크였어요. 당초 16강 진출도 어려운 전력이라는 말을 들었던 데다 간판스타 크리스티안 에릭센 선수가 대회 첫 경기에서 급성 심정지로 쓰러지는 충격적 일을 겪었는데도 4강에 올랐거든요. ‘바이킹의 후예’답게 저력을 보여줬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바이킹은 8세기 말부터 12세기까지 해상을 통해 유럽 각지에 침입해 약탈·교역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한 북게르만족을 말해요. 덴마크를 비롯한 스웨덴·노르웨이 등 북유럽 국가들의 뿌리가 되는 세력이에요. 주로 약탈을 일삼은 해적 집단 이미지가 강하죠. 바이킹은 어떤 사람들이기에 이런 이미지를 갖게 됐을까요?

◇북유럽 국가들의 뿌리

바이킹(Viking)이란 이름의 기원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는데, 바이킹의 원 거주지가 고산 지대 깊고 험한 계곡이었기 때문에 고대 노르만어로 ‘작은 만(灣)’ 또는 ‘맨 뒤’를 뜻하는 ‘vik’와 ‘~의 아들’을 뜻하는 ‘ing’를 합한 말이라는 설이 유력해요.

바이킹은 사는 곳에 따라 노르웨이계·덴마크계·스웨덴계로 나뉘어요. 노르웨이계 바이킹은 주로 정치적 기반이 약한 지역을 침략했는데, 9세기에 아일랜드 더블린 지역에 쳐들어가 왕으로 군림하기도 했어요. 이때 더블린이 일대 무역의 중심지로 번성했대요.

‘배를 젓는 사람’이라는 뜻의 ‘루스(Rus)’인으로 불린 스웨덴계 바이킹은 지금의 폴란드 등 동유럽과 러시아를 거쳐 흑해와 카스피해에 이르는 다양한 동방 루트를 개발해 광대한 지역을 호령했죠. 이들은 러시아 국가 형성에도 영향을 줬어요. 이들의 족장이었던 리우리키드 루리크가 당시 잦은 분란에 시달리던 슬라브인들로부터 통치자가 되어달라는 요청을 받고 862년 ‘노브고로드 공국’을 건설한 게 러시아의 시작이에요. 덴마크계 바이킹은 영국과 프랑스 등 서유럽 전역의 도시들을 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 약탈했어요.

◇교역도 활발히 했대요

바이킹이 약탈을 일삼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게 그들의 전부는 아니에요. 이들은 물자 위치와 운반 경로 등 정보가 많았기 때문에 서유럽과 동유럽, 러시아 지역 일대 무역을 주도했죠. 그들은 비단·향신료 등을 구입하고, 모피·상아·호박·꿀 등을 팔았어요.

바이킹이 이토록 멀리 돌아다닌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선 척박한 기후 속에서 급증하는 인구에 비해 식량이 풍부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또 토지를 장남에게만 상속하는 문화 때문에 다른 아들들은 스스로 땅을 개척해야 했죠. 무엇보다 독립심, 모험심, 자유를 갈구하는 성향 등이 다른 민족보다 강했어요.

뛰어난 배 건조 기술과 항해술도 바이킹의 특징이에요. 이들은 북쪽 바다의 강한 파도를 이기기 위해 배 앞과 뒤를 극단적으로 치켜올린 가늘고 긴 배, ‘롱십(longship)’을 만들었어요. 롱십은 수심이 얕은 강에서도 탈 수 있어 유럽 내륙까지 진출할 수 있었죠. 바이킹이 무역에 이용한 대형 배 ‘크나르(Knarr)’는 노가 60개나 되고, 60~150명이나 탈 수 있었대요.

바이킹은 배에 큰 돛을 달고 노르웨이에서 아이슬란드까지 단 9일 만에 주파했어요. 낮엔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막대기의 그림자를 보고 방향을 찾았고, 밤에는 매나 까마귀를 날려 보내 이들이 날아간 방향을 보고 육지 위치를 확인했대요.

바이킹이 개척한 항로는 크게 3개였어요. 발트해에서 동쪽으로 향하는 동쪽 항로, 북해 서쪽을 항해하는 서쪽 항로, 스칸디나비아 반도 북쪽으로 올라가 그린란드에 이르는 북쪽 항로가 있었죠. 이 항로들을 통해 서방과 동방, 심지어 북미 대륙까지 진출했어요.

10세기 노르웨이계 바이킹이 사용하던 헬멧. /위키피디아

◇다양한 문화 탄생시키기도

현재 프랑스의 모체가 된 서프랑크의 카페 왕조는 911년 노르웨이계 바이킹 족장 롤로가 진출한 지역을 그의 영토로 인정해 ‘노르만인(북유럽인)이 정착한 지역’이라는 뜻의 ‘노르망디’ 공국을 세우게 했어요. 이후 롤로의 후손 노르망디 공 윌리엄이 1066년 도버해협 건너편의 잉글랜드를 공격하고 노르만 왕조를 세웠죠.

10세기 바이킹 지도자 레이프르 에이릭손은 그린란드 남서부에 식민지를 개척한 뒤 북아메리카의 체사피크만 부근에 도달했어요. 그는 그곳을 ‘포도가 나는 땅'이라는 뜻의 ‘빈란드섬’이라고 명명했는데, 지금의 캐나다 뉴펀들랜드섬이에요. 처음으로 대서양을 횡단해 아메리카 대륙에 도달한 사람이 바이킹이었던 거예요. 1492년 이탈리아 출신 콜럼버스가 서인도 제도에 도달한 것보다 500년이나 앞섰어요.

바이킹은 300년 넘게 유럽 전역에서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그 결과 다양한 문화가 탄생하기도 했어요. 자신의 문화를 다른 지역에 전파했고, 프랑스·로마·비잔틴·아랍 문화와 접목해 건축 등 발전에 기여했죠. 바이킹이 개척한 항로는 북대서양, 북해, 러시아 일대 교역권을 형성했고, 훗날 유럽 경제 발전에도 큰 영향을 줬어요.

바이킹에 공격을 받은 뒤 귀족들이 바이킹 침입을 막으려 자체적으로 성을 쌓고 기사를 고용했는데, 이것이 봉건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계기 중 하나 였어요. 앵글족·색슨족 등 다양한 민족들이 바이킹에 맞서기 위해 300여 년간 연합하면서 자연스럽게 영국의 통일로 이어졌고요. 바이킹의 활동은 영국에 해양 지배의 중요성을 알려줬답니다.

◇뷔페, 요일 이름도 바이킹에서 전해져

바이킹의 흔적은 우리 일상 곳곳에도 남아 있어요. 여러 음식을 늘어놓고 먹는 ‘뷔페’도 바이킹이 약탈한 음식을 널빤지에 펼쳐 놓고 먹던 방식에서 시작됐대요. 수요일(Wednesday), 목요일(Thursday), 금요일(Friday)은 바이킹이 숭배하던 전쟁의 신 오딘(Odin·Wotan이라고도 불렸음), 천둥의 신 토르(Thor), 풍요의 신 프레이(Frey)의 이름에서 따왔고요.

바이킹은 남녀 간, 신분 간 평등한 문화였는데, 이것이 오늘날 북유럽 국가들의 수평적 문화의 근간이 됐어요. 바이킹이 파리를 침략했을 때 파리 시민이 항복을 선언하고 바이킹에게 “누가 당신들의 왕이오? 직접 대화를 하고 싶소”라고 묻자, 모든 바이킹이 웃으며 “여기 있는 우리 모두가 왕이다!”라고 했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이혼 소송을 제기할 만큼 남녀 평등 사회였대요.

[블루투스와 바이킹 왕]

10세기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최초로 통일한 바이킹 하랄 블로탄 왕은 블루베리를 너무 좋아해 늘 치아가 파랬기 때문에 ‘푸른 이의 왕’이라고 불렸대요. 스웨덴의 한 전자 회사가 전자 기기를 무선으로 연결하는 기술을 개발한 후 ‘하랄 블로탄이 북유럽을 통합했듯 모든 전자 기기를 하나로 통합할 수 있다’는 의미로 그의 별명을 따 ‘블루투스(Bluetooth·파란 이)’라고 이름 붙였어요. 로고도 ‘하랄’과 ‘블로탄’의 이니셜 H, B에 해당하는 바이킹이 사용한 룬 문자 ‘ᚼ'와 ‘ᛒ'를 합쳐 만들었대요.

블루투스 로고/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