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김포 장릉(章陵) 앞에 대규모 아파트가 세워지고 있어 논란이에요. 장릉은 조선 16대 왕 인조(재위 1623~1649년)의 아버지 원종(1580~1619)과 왕비의 무덤이에요. 현행 문화재보호법은 문화재 반경 500m 안에 높이 20m 이상 건물을 지으려면 사전에 문화재청 심의를 받도록 규정하는데, 건설사들이 심의를 받지 않고 아파트 공사를 추진한 거예요. 문화재 보호와 입주민의 재산권 중 어떤 것이 더 중요한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어요.

조선의 왕과 왕비의 무덤인 ‘조선왕릉’은 선조와 그의 업적을 기리고 존경을 나타내는 곳인 동시에 새로 즉위한 국왕이 선왕에 대한 효심을 온 세상에 드러내며 왕권의 정통성을 보여주는 장소였어요. 죽은 자의 안식처이지만, 후손들의 정치적 야심과 음모가 배어 있는 곳이기도 하지요.

조선왕릉은 총 42기(基)가 있는데 그중 북한에 있는 2기를 제외한 40기가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어요. 조선왕릉은 어떤 곳에, 어떤 절차로 만들어졌을까요?

◇'배산임수’의 명당

조선왕족의 무덤은 신분에 따라 능(陵), 원(園), 묘(墓)로 나뉘어요. ‘능’은 왕과 왕비의 무덤이고, ‘원’은 왕세자와 왕세자빈, 왕을 낳은 왕족의 무덤이며, ‘묘’는 나머지 왕족의 무덤이에요.

왕이 승하하면 온 궁궐은 ‘국장(國葬)’을 치르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어요. 국장은 최고의 예를 갖추어 엄격하게 치러졌기 때문에 절차가 매우 복잡하고 시간도 오래 걸렸지요. 왕릉 건설에만 보통 6000명에서 많게는 1만5000명이 동원됐고, 죽음부터 매장까지 총 5~7개월이 걸렸다고 해요.

왕릉 조성의 첫 단계는 ‘명당(明堂)’을 찾는 일이었어요. 왕릉 터는 ‘관상감(觀象監)’에 소속된 지관(地官)을 중심으로, 풍수에 밝은 조정 대신들이 모여 결정했죠.

왕릉 입지는 풍수지리 사상(지형이나 방위 등을 사람의 길흉화복과 연결시켜 알맞은 묏자리나 집터를 구하는 이론)에 기초해 정했어요. 특히 ‘장풍득수(藏風得水)’가 중요했는데, 이는 ‘바람은 가두고 물을 얻는다’는 뜻이에요. 하지만 여기서 ‘장풍’은 무조건 바람을 막기만 하는 게 아니라 세찬 바람은 막고 적절한 바람은 불게 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적절하게 바람이 흐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 것이지요. 이렇게 장풍득수가 되기 위해선 산을 등지고 앞으론 물을 바라보는 배산임수(背山臨水) 지형이 가장 적합하대요. 이에 따라 조선왕릉은 뒤쪽엔 산이 있고 앞쪽에는 물이 흐르며 봉분 앞쪽은 먼 산을 내다보며 넓게 트인 개방된 공간이 연출되도록 했어요. 왕릉에 가서 홍살문을 지나 정자각을 향해 걷다 보면 상쾌한 산들바람이 우리를 맞아주는데, 이것도 바로 그런 고안 때문이에요.

◇묏자리 두고 정치적 대립도

왕릉은 풍수지리상 길지(吉地)여야 했을 뿐 아니라 주변 다른 시설물과는 떨어져 있고, 후대 왕이 자주 찾을 수 있도록 왕궁이 있는 한양에서 멀지 않아야 했어요. 이를 다 충족하는 장소를 찾는 건 쉽지 않았기 때문에 터를 정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지요.

신하들의 의견 대립으로 늦게 정해지는 경우도 있었어요. 1600년 선조(재위 1567~1608년)의 왕비인 의인왕후가 승하하자 경기 포천에 무덤 터를 잡아 명나라 장수에게 보여줬어요. 그런데 그가 터가 좋지 않다고 해서 파주 교하현으로 옮겼죠. 그 터를 놓고도 신하들의 의견이 갈려 결정이 미뤄졌고, 결국 영의정 이항복의 중재로 무려 9개월이 지나서야 터(구리 동구릉)가 정해졌어요.

1659년 효종(재위 1649~1659년)의 무덤 터를 정하는 과정에는 남인과 서인의 정치적 대립이 영향을 끼쳤어요. 왕이 승하하자 처음엔 남인 윤선도가 추천한 경기 수원으로 정해서 공사가 시작됐지만, 한 달 반 정도 지나 송시열 등 서인의 반대로 다시 건원릉(태조 이성계의 능) 주변으로 옮겼죠. 하지만 이후 석물(石物)이 계속 금이 가는 등 파손이 돼서 경기 여주 영릉(세종대왕의 능) 근처로 옮겼어요.

◇왕릉을 만든 사람들

왕릉 터가 정해지고 나면 공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됐어요. 왕릉 조성에는 정해진 규범이 있어서 유능한 기술자들을 모아 일을 추진하면 됐거든요.

왕릉 조성은 여러 부서들이 분담했어요. 시신을 안치할 구덩이를 파고 임시 건물과 기계를 제작하는 핵심 부서인 ‘삼물소’를 비롯해 정자각·재실 등 목조건물을 만드는 ‘조성소’, 석물을 제작하는 ‘부석소’ 등이 있었어요.

제일 어려운 일은 좋은 석재를 구하는 일이었어요. 그중 봉분 바로 앞에 놓이는 ‘혼유석(魂遊石)’이 가장 큰 문제였어요. 혼유석은 영혼이 나와서 노닐 수 있게 만든 장소예요. 보통 가로 10자(약 3m), 세로 6자(약 2m), 두께 1자 8치(약 0.75m) 정도로 크기도 컸지만 바닥이 평평해야 했고, 또 이상한 무늬가 섞여 있으면 쓸 수가 없어 알맞은 석재를 구하는 게 무척 어려웠습니다.

[김포 장릉의 주인 ‘원종’]

고층 아파트로 논란이 되는 장릉의 주인 원종(1580~1619)은 선조의 아들로 광해군의 배다른 동생이에요. 원종은 임금이 된 형 광해군 때문에 큰 고통을 받았어요. 광해군은 자기 왕위를 위협할까 봐 원종과 그 주변 사람들을 끊임없이 감시했고, 원종의 막내아들 능창군은 역모로 몰려 유배 간 뒤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죠. 원종은 걱정과 답답한 심정으로 술만 마시다 마흔도 안 돼 화병으로 숨졌지요. 동생과 아버지의 원통한 최후를 지켜본 둘째 아들 능양군은 1623년 반정(反正·왕을 폐위하고 새 임금을 세움)으로 왕이 됐는데 그가 바로 인조예요. 인조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왕과 왕후로 추존(追尊)했어요. 추존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이에게 왕의 칭호를 내리는 거예요. 그리고 경기도 양주에 있던 부모의 묘를 김포로 옮기고 ‘원’에서 ‘능’으로 승격시켰고요.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장릉은 이런 파란만장한 원종의 삶과 닮은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