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삶은 그들이 남긴 위대한 유산만큼이나 다양했습니다. 그래서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기록돼 있죠. 올해로 탄생 200주년을 맞은 벨기에의 작곡가 세자르 프랑크(1822~1890)는 대중의 무관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묵묵하게 걸어간 예술가 중 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음악 세계를 꽃피울 때까지 오랜 세월을 인내하며 기다린 끝에 멋진 결실을 보았죠. 이 때문에 대표적인 ‘대기만성(大器晩成)’ 음악가로 꼽힌답니다.
◇프란츠 리스트가 극찬한 작곡가
세자르 프랑크는 독일과 접경해 있는 지역인 벨기에 리에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어려서부터 뛰어난 음악가로 키우려고 했죠. 프랑크는 리에주 음악원을 거쳐 1837년부터 파리 음악원에서 공부했습니다. 이곳에서 피아노와 작곡, 오르간을 배운 그는 모두 우수한 성적을 거뒀지만 아버지의 지나친 관심 때문에 학업을 중단하고 잠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죠.
1843년 다시 파리로 돌아온 프랑크는 실내 악곡과 종교음악 등을 작곡하면서 점차 음악계에서 인정받는 작곡가로 자리를 잡아 갔습니다. 그가 무엇보다 큰 관심을 보였던 분야는 오르간 연주와 작곡이었죠. 프랑크는 노트르담 드 로레트 성당에서 오르간을 연주하다가 1858년 1월 생 클로틸드 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 취임합니다. 19세기 세계적인 음악가로 손꼽히는 프란츠 리스트(1811~1886)는 그가 1860년대 작곡한 오르간 곡을 두고 “최고의 오르간 작품”이라며 극찬했다고 전해져요.
그는 음악가들 사이에서 훌륭한 스승으로도 유명했습니다. 꾸준히 연주가와 작곡가로 명성을 높여가던 프랑크는 1872년부터 파리 음악원의 교수로 부임해 선생님으로 많은 활동을 하게 되는데요. 19세기 후반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곡가인 앙리 뒤파르크, 뱅상 댕디, 에르네스트 쇼송, 가브리엘 피에르네 등이 그의 문하에서 성장한 제자들이었어요. 이들은 이른바 ‘프랑키스트’(프랑크 악파)라 불리며 스승의 음악 세계를 유럽 전역에 알렸습니다.
◇예순 가까운 나이에 결실 봐
이처럼 프랑크는 젊은 시절부터 음악가들 사이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지만, 정작 그의 작품은 청중에게 큰 인기를 끌지 못했습니다. 그의 작곡 기법 때문이었는데요. 프랑크는 특정한 멜로디나 몇 개의 음으로 만들어진 모티브(음악 형식을 구성하는 단위)가 전곡에 걸쳐 등장하는 ‘순환동기’ 기법을 썼습니다. 이 기법은 곡 중간에 등장하는 대목의 분위기나 작곡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따라 성격이 자유롭게 변화하지만, 같은 모티브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작품 전체에 통일성을 부여하죠.
그런데 화려한 오페라나 오페레타 등을 선호하던 당시 프랑스 사람들은 프랑크의 음악이 지나치게 어렵고 심오하다고 여겼어요. 변화를 준 모티브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다 보니 구성이 지나치게 논리적이고 복잡하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이와 비슷한 기법은 독일의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가 오페라에서 주로 사용했는데요. 대중은 프랑크가 독일 작곡가 영향을 받은 작품을 쓰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죠.
작품의 인기는 별로 없었지만, 프랑크는 대중적인 유행과 타협하지 않았어요. 그는 지속적으로 자신만의 기법을 발전시켜 나갔고, 결국 예순에 가까운 나이가 되어 결실을 보게 됩니다. 그가 쓴 작품이 주목받기 시작한 거예요.
오늘날 알려진 프랑크의 작품들은 대부분 만년에 발표된 작품이에요. ‘피아노 5중주 F단조’(1879), ‘교향곡 D단조’(1888), ‘현악 4중주 D장조’(1889) 등이 대표작이죠. 장르마다 단 한 곡씩만을 남겼다는 것도 특이하답니다.
◇'생명의 양식’이 가장 유명
프랑크의 작품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곡은 ‘생명의 양식’(Panis Angelicus)이에요. ‘천사의 빵’으로도 번역되는 이 노래는 중세 유럽의 스콜라 철학을 대표하는 이탈리아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쓴 가사로 만든 것인데, 가톨릭 미사의 영성체 의식에서 불리는 노래죠. 프랑크는 1872년 남성의 가장 높은 음역대인 테너 목소리를 위한 노래를 만들었는데요. 오르간·하프시코드·첼로·더블베이스가 함께 연주하는 곡이었어요. 그는 이때 만든 노래를 과거 만들어 둔 미사곡에 추가했는데, 이 곡이 생명의 양식입니다. ‘생명의 양식을 하늘의 만나를 / 마음이 빈 자에게 내려주소서’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이 작품은 아름다운 멜로디와 경건한 분위기로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고 널리 불리는 명곡이 되었습니다.
동서고금의 바이올린 소나타 중 가장 유명한 ‘바이올린 소나타 A장조’(1886)도 빼놓을 수 없는 프랑크의 대표작입니다. 이 곡은 프랑크와 같은 벨기에 사람이었던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외젠 이자이(1858~1931)의 결혼 선물로 만들어진 작품이었어요. 프랑크는 그해 여름 네 악장으로 구성된 바이올린 소나타를 완성했고, 이자이의 결혼식 날인 같은 해 9월 26일 그 악보를 선물했죠.
이 작품의 네 악장에는 프랑크 특유의 순환동기가 잘 나타나 있는데요. 사랑을 그린 작품인 만큼 악장마다 특징적인 주제를 담고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어요. 1악장은 연애의 시작, 2악장은 감정의 폭발, 3악장은 연인의 속삭임, 4악장은 행복한 결혼을 그리고 있다고 하죠.
이자이는 감사의 마음으로 이 소나타를 40여 년간 꾸준히 연주하며 청중에게 널리 소개했어요. 워낙 인기가 많다 보니 바이올린 외에도 첼로·플루트 등 다양한 악기로 편곡돼 연주된답니다. 작년 12월 30일 우리나라 피아니스트 손열음의 연주회에서는 플루트·첼로·오보에·바이올린 등 네 악기가 한 악장씩 돌아가며 이 소나타를 연주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김주영·피아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