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5월 10일 취임하는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대통령 집무실을 청와대에서 용산으로 옮기고, 청와대는 국민에게 개방한다”고 했어요. 이렇게 되면 청와대 자리는 고려 숙종 때인 1104년 처음 궁궐이 들어서고 나서 918년 만에 ‘최고 권력자’와 무관한 장소가 된다고 해요. 경복궁 뒤쪽 청와대 자리는 깊은 역사가 깃든 곳이랍니다.
◇고려 숙종, 남경에 궁궐 지어
고려시대 우리나라의 수도는 개경(開京)이었어요. 지금은 북한에 있는 개성의 옛 이름이죠. 그런데 수도를 뜻하는 서울 경(京) 자가 붙은 곳이 세 군데 더 있었습니다. 서경(西京·평양), 동경(東京·경주), 그리고 남경(南京)이죠. 이 세 도시를 ‘삼경’이라 불렀는데, 개경 다음가는 중요한 도시들이자 임금이 지방을 순행할 때 머물던 곳이기도 했죠.
남경은 지금의 서울 중에서도 한강 북쪽이었습니다. ‘고려사’에는 1068년(문종 22년) 남경에 신궁(새 궁전)을 세웠다고 기록돼 있어요. 그전까지 사람이 많이 살지 않던 이 지역에 남경을 만든 이유는 ‘삼각산 아래 지역이 제왕의 도읍이 될 만하다’는 ‘도선기’ 같은 옛 책을 믿었기 때문이래요. 단순히 풍수지리설만 따른 건 아니고, 넓은 한강이 가까이 있어 물길을 통한 유통에 유리했다는 강점이 있었다고 합니다.
30여 년이 지난 15대 왕 숙종(재위 1095~1105) 때는 아예 남경으로 천도(수도를 옮길)할 계획을 세우고 1104년에 남경 궁궐을 완성합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 장소가 ‘경복궁 북쪽’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지금의 청와대 자리였던 것이죠. 남경 천도는 계획대로 이뤄지지 않았지만 궁궐은 고려 말까지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백성도 드나들던 경복궁 후원
1392년 개국한 조선왕조는 한양(지금의 서울)을 새 수도로 삼아 경복궁을 지었어요. 그 후원 격인 청와대 자리는 궁궐 부지의 일부였는데 이곳에 신하들이 임금에게 충성 맹세를 하는 ‘회맹단’을 만들었다고 해요. 이 자리는 신성한 곳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궁궐 뒤쪽에서 술과 잔치를 즐기던 10대 임금 연산군마저도 건드리지 못했다고 해요.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복궁은 모두 불타 버렸어요. 청와대 터 역시 오랫동안 빈터로 방치돼 있었죠. 그러나 1865~1868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이곳을 창덕궁의 넓은 후원인 ‘춘당대’ 같은 곳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경무대(景武臺)란 이름의 후원을 조성했죠. ‘경무’란 경복궁의 ‘경’과 근처에 있는 경복궁 북문 신무문의 ‘무’에서 한 글자씩 땄다는 얘기가 있지만, ‘경무’란 말 자체에 ‘큰 계책으로 나라의 난리를 진압한다’는 뜻이 있다고 해요.
궁궐 뒤쪽, 산 밑에 있는 숨겨진 장소니까 백성은 감히 가까이 갈 수도 없는 출입금지 지역이었을까요? 꼭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경무대에는 모두 32동의 건물이 있었는데 임금의 휴식 공간 ‘오운각’, 과거시험과 군사훈련을 치르는 ‘융문당’ ‘융무당’, 풍년을 기원하며 농사도 지을 수 있는 ‘경농재’ 등이 들어섰다고 해요. 과거시험 응시자 같은 백성이 여기 출입할 수 있었다는 것이죠.
◇민족 말살 정책 시기의 총독 관저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 병합된 뒤 총독부는 경복궁의 여러 전각을 훼손했고, 경무대 건물들도 철거했어요. 그런데 융문당과 융무당만은 살아남았는데요. 용산으로 옮겨져 일본 절 건물로 사용됐는데 광복 후 원불교가 건물을 인수해 사용하다가 2007년 전남 영광으로 옮겼습니다.
일제는 빈 경무대 땅에 조선을 통치하는 최고위직인 총독이 살기 위한 관저를 세웠습니다. 원래 총독 관저는 왜성대(지금의 서울 중구 예장동)에 있었는데, 1926년 경복궁 내부로 옮겼고 다시 1939년 화려한 기와로 장식한 관저 건물을 경무대 자리에 신축했습니다.
그러니까 1939년부터 1945년까지 6년 동안 ‘조선의 히틀러’라고 불렸던 7대 총독 미나미 지로, 8대 총독 고이소 구니아키, 마지막 총독인 9대 아베 노부유키까지 세 총독이 이곳에서 살았던 겁니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거치며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이 본격화됐던 시기였죠.
◇대한민국 대통령 집무실·관저 들어서
1945년 광복 이후 총독 관저는 잠시 미 군정 사령관 존 리드 하지 중장의 관저로 쓰였어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서자 초대 이승만 대통령은 거처를 이화장에서 옛 총독 관저로 옮겼고, 건물 이름을 ‘경무대’라고 해 옛 이름을 되살렸습니다. 건물 1층은 집무실, 2층은 생활공간으로 썼기 때문에 경무대는 대통령 집무실 겸 관저가 됐죠.
하지만 이승만 정부의 독재가 길어지면서 ‘경무대’는 권력 남용의 상징과도 같은 이름으로 변했습니다. 1960년 4·19 혁명 때는 경무대 근처까지 온 시위대 중 일부가 경찰의 발포로 희생되는 비극도 일어났죠.
4·19로 이승만 대통령이 퇴임하고 제2공화국이 들어서면서 부정적 이미지의 경무대라는 이름을 바꾸자는 여론이 생겨났습니다. 새 이름의 후보로 오른 것은 ‘청기와집’이란 뜻의 ‘청와대(靑瓦臺)’와 조선왕조 개국 당시 나라 이름의 후보였던 화령(태조 이성계의 출생지인 함남 영흥의 옛 이름)에서 딴 ‘화령대(和寧臺)’였습니다. 윤보선 대통령은 ‘청와대’란 이름을 골랐습니다. 이때가 1960년 12월이었어요.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이 취임한 뒤 청와대를 ‘황와대(黃瓦臺)’로 바꾸자는 의견이 나왔다고 합니다. 푸른색보다는 노란색이 전통적으로 존귀한 색깔이기 때문이었다는 거죠. 그러나 박 대통령은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집 이름을 바꿔서야 되겠는가”라며 ‘청와대’란 이름을 그대로 썼다고 합니다.
청와대에는 1~3대 이승만 대통령부터 4대 윤보선, 5~9대 박정희, 10대 최규하, 11·12대 전두환, 13대 노태우, 14대 김영삼, 15대 김대중, 16대 노무현, 17대 이명박, 18대 박근혜, 19대 문재인 대통령까지 모두 12명의 대통령이 거주하고 집무했습니다. 그동안 산업화·민주화·정보화를 이룬 대한민국 역사의 중요한 장면들이 숱하게 이곳에서 이뤄졌습니다. 현재의 청와대 본관 건물은 노태우 대통령 시절인 1991년 신축된 것입니다.
[1·21과 10·26]
청와대와 관련된 한국 현대사의 가장 충격적인 두 가지 사건·사고는 1968년의 1·21 사태와 1979년의 10·26 사태를 들 수 있습니다. 1·21 사태는 휴전선을 넘어온 북한의 무장 게릴라 31명이 청와대를 공격 목표로 삼아 침투했던 사건입니다. 청와대에서 불과 500m 떨어진 곳까지 진입했지만 우리 군과 경찰이 전투를 벌여 이들을 진압했습니다.
1979년의 10·26 사태는 청와대 부지 안에 있는 안가(특수 정보기관 등이 비밀 유지를 위해 쓰는 집)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탄에 맞아 서거한 사건입니다. 제4공화국의 유신 체제가 끝나고 제5공화국이 들어서는 계기가 됐죠. 이 안가 자리엔 지금 ‘무궁화동산’이 들어서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