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군과 백제고도문화재단에서 발굴하고 있는 부여 가림성(加林城) 터에서 돌로 쌓은 성벽과 배수로 흔적이 나왔어요. 백제 동성왕 23년(501)에 백가(苩加)라는 사람이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번 조사에서 이걸 확인한 거예요. 백가는 자신을 지방으로 쫓아낸 데 원한을 품고 동성왕을 살해한 뒤 반란을 일으킨 인물로 나와요. 동성왕을 이어 즉위한 무령왕이 백가의 반란을 평정하고 왕권을 안정시킵니다. 이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①부여 가림성(加林城) 성벽 발굴 모습이에요. 가림성의 성벽은 장방형으로 잘 치석한 화강암을 한 단 한 단 층을 맞춰 쌓았어요. ②동성왕이 살해된 후 즉위한 무령왕의 표준 영정. ③가림성 정상부에 있는 사랑나무와 성벽의 모습. 이 나무는 지난해 천연기념물로 지정됐어요. /백제고도문화재단·한국공예디자인진흥원

◇동성왕의 죽음과 백가의 반란

동성왕(재위 479~501년)은 475년 한성(지금의 서울)에서 웅진(공주)으로 수도를 옮긴 후 불안하고 약해진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한성 옛 귀족들 대신 지방 세력을 등용했어요. 웅진을 본거지로 했던 백가를 ‘위사좌평’(衛士佐平·궁궐을 지키며 군사 업무를 관장한 백제의 제1품 관직)이라는 높은 벼슬을 내려 중용한 것도 그 때문이죠. 오늘날 대통령 경호실장에 해당하는 자리예요. 그 뒤 백가는 동성왕 시대의 정치 중심에 있었답니다. 그런데 백가가 동성왕을 살해합니다.

삼국사기에 동성왕 살해 사건 경위가 자세하게 나오는데요. 501년 11월 동성왕이 사비(부여) 서쪽 벌판에서 사냥하다가 큰 눈이 내리자 가림성에 접해 있던 ‘마포촌’(馬浦村·충남 서천군 한산면)에서 머물게 됐대요. 그런데 가림성에는 당시 중앙 정계에서 밀려나 쫓겨난 백가가 머물고 있었어요. 백가는 지방으로 전출 가기 싫어 병을 핑계 삼아 사양하다가 어쩔 수 없이 가림성으로 부임하게 됐다고 하죠. 그 일로 백가는 동성왕을 원망했는데, 왕이 마침 근처에 오자 자객을 시켜 칼로 찔렀다는 거예요. 이 암살 시도 후 동성왕은 치료받다가 한 달 만에 세상을 떠나고 무령왕(재위 501~523년)이 즉위하죠.

◇백가의 단독 범행일까

삼국사기에는 백가가 동성왕을 죽이려 했던 이유에 대해 지방인 가림성으로 좌천된 일이라고 나와 있어요. 그런데 가림성은 금강 하구 요충지예요. 금강변에 있는 사비나 웅진으로 진입하는 길목이죠. 정상에 오르면 멀리 부여읍 부소산성이 보이고, 논산·익산을 비롯한 금강 하류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교통 요지예요. 백제 부흥 운동기에 나당 연합군이 가림성이 험하고 견고해서, 공격하면 희생이 많고 시간도 오래 걸릴 것을 우려해 우회했다는 기록이 있음을 보면 이곳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어요. 그런 점에서 볼 때 백가가 가림성으로 전출된 걸 중앙 무대에서 축출됐다고만 보긴 어렵다는 주장도 나와요.

더구나 동성왕 암살을 전후한 백가 행동에는 몇 가지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 있어요. 우선 501년 11월 동성왕을 죽인 건 백가가 아니라 자객이에요. 그런데 이 자객에게 누가 사주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어요. 동성왕은 칼에 찔리고 나서 한 달 뒤 숨졌는데, 그동안 백가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어요. 백가가 반란을 일으킨 건 이듬해 1월, 그러니까 동성왕이 칼에 찔리고 두 달이 흐른 뒤예요. 왕이 죽고 새 왕(무령왕)이 집권한 다음이죠. 정말 왕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면, 암살을 시도한 뒤나 왕이 죽고 나서 바로 반란을 일으켰겠지요.

더구나 백가는 가림성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켰는데요. 만약 그가 동성왕 암살 사건을 주도했다면 곧바로 중앙으로 진출해 국정 주도권을 장악하려 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어요. 무령왕은 백가가 반란을 일으키자 토벌군을 보냈어요. 백가는 이때 별다른 저항 없이 항복했는데, 토벌군은 그의 목을 베어 백강(白江·금강)에 던졌다고 해요. 이를 두고 백가가 살아남으려 항복했고, 스스로 죽임을 당할 정도로 중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지적도 있어요. 억울함을 호소하고 싶었다는 거예요.

◇동성왕 암살과 무령왕의 즉위

501년 동성왕 암살 사건이 백가 단독 범행이 아니라면 배후는 누구였을까요. 동성왕은 담력이 세며 활을 잘 쏘았고, 신라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침입을 잘 막아냈어요. 하지만 말년에 민심을 잃었다는 기록이 곳곳에서 발견돼요.

499년 큰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고 도적이 일어났는데요. 신하들이 창고를 열어 구제할 것을 청했지만, 동성왕은 듣지 않았어요. 그러자 북쪽 지방에 살던 2000여 주민이 고구려로 도망쳐 버리죠. 또 500년에는 왕궁 동쪽에 높이가 5장(약16.5m)이나 되는 임류각(臨流閣)을 짓고 여기에 연못을 파서 기이한 짐승을 길렀다고 해요. 백성을 돌보지 않고 사치스러운 건물을 짓자 신하들이 상소를 올려 부당함을 호소했는데, 오히려 궁궐 문을 닫아버렸대요. 동성왕은 당시 나라와 백성을 돌보지 않았던 거예요. 백제 역사를 기록한 백제신찬(百濟新撰)에는 무령왕 즉위 과정에 대해 “동성왕이 무도하고 백성들에게 포학해서 국인(國人·나라 사람들)이 함께 제거하여 무령왕을 세웠다”는 내용이 있어요. 이때 국인은 백제 귀족 계층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이 사건이 동성왕을 반대하는 귀족 세력의 친위 쿠데타임을 의미하는 대목이죠.

501년 동성왕 암살 사건의 최대 수혜자는 무령왕이에요. 동성왕의 정변에 무령왕이 개입했다는 직접 근거는 없지만, 동성왕에 대한 불만이 커질수록 그의 위상은 올라갔어요. 무령왕이 새로운 지도자로 결정되자 정변을 주도하는 세력이 동성왕 핵심 측근인 백가를 시켜 동성왕을 시해했다는 분석이 설득력 있습니다. 하지만 새로 왕위에 오른 무령왕은 왕권의 정통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고, 모든 걸 백가의 단독 범행으로 몰아가서 자기 부담을 덜려고 했던 거죠. 이에 백가는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가림성에서 반란을 일으켰지만, 새로 출범한 무령왕 정권의 희생 제물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가림성과 사랑나무]

가림성은 부여군 임천면의 해발 250m 성흥산 정상부에 있는 백제의 산성이에요. ‘성흥산성’(聖興山城)이라고도 불렀죠. 백제 때 축조한 성곽 가운데 축성 시기와 명칭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에요. 산꼭대기 부분에 띠를 두른 것처럼 약 1350m의 성벽을 쌓았는데, 이번 발굴에서 성벽이 최고 높이 5.2m에 폭 12m라는 것이 밝혀졌어요. 백제 때는 화강암을 가공해 외벽을 쌓고 안쪽에 흙을 채우는 방식으로 성벽을 만들었는데요. 통일신라와 고려·조선시대에도 계속해서 보수가 이뤄졌어요.

가림성 정상부에는 흔히 ‘사랑나무’라 부르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는데요. 수령이 400년 이상인 이 나무는 높이 22m, 나무 둘레 5.4m로 지난해 천연기념물로 지정됐어요. 사랑나무는 나뭇가지가 늘어져 있는 모양이 꼭 하트를 닮았다고 해서 붙은 애칭인데, 각종 영화와 드라마 촬영지로 유명해져 전국에서 많은 가족과 연인이 찾는 명소가 됐어요.

이병호 공주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