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의회가 국호를 ‘아오테아로아’(Aotearoa)로 바꾸는 방안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는 소식이 지난 7월 전해졌어요. 아오테아로아는 원주민 마오리족이 뉴질랜드를 부르는 지명인데요. 현지에서도 뉴질랜드와 아오테아로아 지명이 혼용되고 있다고 해요.

터키는 지난 6월 국호를 튀르키예(Tujrkiye)로 바꿨는데요. 튀르키예는 터키어로 ‘튀르크인의 땅’을 뜻해요. 튀르크족은 오늘날 몽골 초원에 살던 사람들로, 튀르키예인은 이들을 자신의 조상으로 여겨요. ‘튀르크’란 ‘힘센’ ‘용감한’ ‘방패’라는 뜻이지요. 국제사회에서 널리 쓰이던 터키(Turkey)라는 이름은 튀르키예의 영어식 표현이에요. 영어 단어 ‘터키’에는 ‘칠면조’라는 의미뿐 아니라 ‘멍청한 사람’ ‘겁쟁이’라는 뜻도 있는데, 이는 용감하다는 뜻을 가진 튀르크와 정반대의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국호를 바꾼 거지요.

이미 국제사회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국호를 변경하는 것은 쉽지 않아요. 국민들의 의견 수렴 과정을 충분히 거쳐야 하고 매우 신중해야 하지요. 이런 어려운 일인데도 역사적인 이유로 국호를 바꾸려고 하거나, 튀르키예처럼 국호를 바꾼 나라들이 여럿 있습니다. 어떤 곳이 있는지 알아볼게요.

①1840년 영국 정부와 50여 명의 마오리족 추장은 마오리족을 보호하는 대가로 뉴질랜드의 주권을 영국 여왕에게 넘기는 내용의‘와이탕기 조약’(The Treaty of Waitangi)을 맺어요. 사진은 와이탕기 조약 당시의 모습을 상상해서 묘사한 그림이에요. ②뉴질랜드가 국호 변경을 논의하는‘아오테아로아(Aotearoa)’는 원주민 마오리족이 뉴질랜드를 부르는 지명이에요. 사진은 뉴질랜드의 마오리족이 2012년 전통 춤을 추는 모습. ③영국군이 아프리카 가나 지역을 식민지로 삼을 당시의 모습을 상상해 그린 그림. /위키피디아

◇유럽인이 붙인 이름 뉴질랜드

뉴질랜드에서는 지난해에도 국호를 바꾸자는 주장이 제기됐어요. 현재의 국호가 식민지 시절 역사를 상기시킨다는 이유 때문인데요. ‘아오테아로아’는 마오리어로 ‘길고 흰 구름’을 뜻해요. 약 1000년 전 마오리족이 처음 뉴질랜드 땅에 이르렀을 때, 뉴질랜드가 길고 흰 구름으로 덮여 있는 것을 보고 지은 이름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왜 국호가 ‘뉴질랜드’가 된 것일까요?

1642년 네덜란드의 탐험가 아벌 타스만 선장은 원주민이 살고 있던 뉴질랜드 섬을 유럽인으로서는 처음 발견합니다. 그리고 뉴질랜드를 ‘노바 제일란디아’(Nova Zeelandia)라고 부르지요. ‘제일란디아’는 네덜란드의 한 지방인 ‘제일란트’(Zeeland)에서 따온 이름인데, 여기에 ‘새로운’(new)이라는 뜻의 라틴어 ‘nova’를 붙인 지명이에요. 하지만 당시 타스만 선장은 뉴질랜드 섬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회항해야 했어요. 상륙 후 마오리족의 공격을 받아 네 명의 선원을 잃었기 때문이었죠.

그러다 뉴질랜드는 영국인에 의해 유럽에 널리 알려지게 되는데요. 섬이 처음 발견되고 약 100년이 지난 1769년 영국인 선장 제임스 쿡은 과학자들과 함께 뉴질랜드 해안을 탐험하고 이곳을 영국 영토로 선언합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소수의 유럽인만 알고 있던 뉴질랜드라는 섬의 지명이 이를 계기로 유럽에 확산하게 되지요.

이후 1840년 영국 정부와 50여 명의 마오리족 추장은 마오리족을 보호하는 대가로 뉴질랜드의 주권을 영국 여왕에게 넘기는 내용의 ‘와이탕기 조약’(The Treaty of Waitangi)을 맺습니다. 하지만 영국 정부가 마오리족의 토지를 가져가려고 하면서 마오리족과 영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어요. 2000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결국 마오리족이 패배하고 말아요. 마오리족은 이후 꾸준히 영국 정부에 대항하다가 1947년에 이르러서야 독립국의 지위를 얻게 됐습니다. 결국 뉴질랜드라는 국호는 유럽인이 붙인 이름이고, 이후 또 다른 유럽인에게 식민 지배를 받았으니 국호가 식민지 시절을 떠오르게 한다는 거지요.

◇정통 흑인 왕국 계승하려는 의지

역사적인 이유로 불리던 이름을 버리고 새로운 국가 이름을 만든 또 다른 나라로는 아프리카의 가나 공화국이 있습니다. 가나 지역은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기 전까지 유럽인들로부터 ‘골드 코스트’(Gold Coast)로 불렸어요. ‘황금 해안’이라고 불린 건데요. 금이 풍부했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 특히 사하라 이남 지역에는 금이 많이 묻혀 있어요. 그래서 3세기 말부터 금 무역을 하며 크게 성장했어요.

가나 지역에 금이 풍부하다는 소식은 신대륙을 개척하던 유럽인의 귀에도 들어가게 됐어요. 1470년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포르투갈인들이 이 땅에 발을 붙입니다. 한 포르투갈 선교사의 기록에 따르면, “해변을 따라 무수히 많은 알갱이가 반짝이고 있었는데 너무 빛나 도저히 눈을 뜰 수 없었다”고 해요. 이 빛나던 알갱이가 바로 금이었던 거예요. 이후 영국·네덜란드·덴마크 등의 선박들도 가나의 해안으로 진출했고, 아프리카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유럽 열강들은 이곳을 골드 코스트라고 부르기 시작했어요.

이 무렵 가나 지역에 살고 있던 아프리카인의 여러 부족 연합은 흥망성쇠를 거듭하던 중이었어요. 그러다 17세기 후반에는 이 등장하는데요. 왕국이 등장하기 전인 16세기부터 왕국이 세워진 이후인 19세기 사이에 이 지역에서 채굴된 금의 양이 150만㎏이나 됐다고 해요. 아샨티 왕국의 한 금광에서는 광부 한 사람이 하루에 2온스(1온스는 28.35g)의 금을 캐낼 정도였다고 합니다.

아샨티 왕국은 풍부한 금 생산량을 바탕으로 주변 부족 국가를 정복하며 세력을 넓혀갑니다. 그러자 위기를 느낀 부족 국가들이 제각기 영국이나 네덜란드·덴마크에 보호를 요청해요. 열강들은 이를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시킬 기회로 삼았고, 열강들 간에도 각축전이 벌어졌어요. 여기서 승리한 국가가 바로 영국입니다.

영국은 19세기 후반 가나 지역의 해안에 있던 연안국 전체를 식민지로 삼았습니다. ‘골드 코스트 직할 식민지 및 보호령’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아예 가나 지역의 이름을 골드 코스트로 못 박은 거예요. 하지만 이 지역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노력한 끝에 1957년 완전 독립에 성공해 골드 코스트라는 이름을 버리고 가나라는 이름을 쓰게 됐지요. 가나 공화국의 ‘가나’라는 이름은 7~13세기 서아프리카의 강국이었던 ‘가나 왕국’에서 따온 거예요. 사실 가나라는 명칭은 왕국의 왕을 가리키는 칭호였고, 이 왕국의 원래 이름은 ‘와가두 왕국’이었는데요. 유럽 상인들이 이 나라를 와가두가 아닌 가나로 많이 불러 ‘가나 왕국’으로 알려지게 됐어요.

가나 왕국은 중계무역을 통해 크게 번성했는데요. 당시 유행하던 이슬람교를 받아들이지 않고 토속 종교를 고수한 정통 흑인 왕국이었어요. 이런 가나 왕국의 정체성을 그대로 이어받고자 한 아프리카인들이 독립을 이루며 가나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서민영 함현고 역사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