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옛 명화를 디지털 이미지로 바꾸어 입체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 미디어 전시가 늘어나고 있어요. 그중 컴컴한 공간에 빛으로 이미지를 쏘아 바닥부터 벽, 그리고 천장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영상을 웅장한 음악과 함께 제공하는 전시를 몰입형 미디어아트라고 합니다.

이탈리아 출신의 예술감독 지안프랑코 이아누치는 몰입형 미디어아트 분야에서 선구적이라고 평가받아요. 그는 프랑스 남부의 레보드프로방스 지역에 있는 채석장을 빛과 음악으로 채워넣어 완전히 색다른 공간으로 탄생시킨 것으로 유명한데요. 그의 작품을 서울 광진구에서도 볼 수 있답니다. 워커힐 호텔앤리조트 공연장을 몰입형 미디어아트 전시장으로 개조한 ‘빛의 시어터’에서는 내년 3월 5일까지 이아누치가 기획한 ‘구스타프 클림트, 골드 인 모션(Gold in Motion)’ 전시를 열어요.

‘구스타프 클림트, 골드 인 모션(Gold in Motion)’ 展 전시 전경. /빛의 시어터

전시 장면을 찍은 사진(사진 1)을 보세요. 원래 미술관의 그림은 어느 한 벽에 고정돼 있지요. 하지만 몰입형 미디어아트 공간에서는 그림의 세부적인 부분이 서서히 바뀌면서, 선이 그려지고 색이 입혀지는 과정이 드러나기도 해요. 꽃이나 덩굴이 조금씩 자라면서 전체로 퍼져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구스타프 클림트(Klimt·1862~1918)의 사진과 작품에서 나온 것이지만, 미디어 연출로 인해 원작을 보는 것과는 다른 분위기를 경험하게 돼요. 디지털 영상으로 연출되기 이전 클림트의 원작들은 어떤 느낌을 주는지, 또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공부해 볼까요.

◇전통에서 벗어나 혁신 꾀해

20세기 직전 오스트리아 빈은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 독일 베를린에 이어 넷째로 인구가 많고 번화한 도시였습니다. 클림트는 빈의 서쪽에 있는 도시 바움가르텐에서 금 세공사의 아들로 태어났어요.

당시 상류층의 자제들은 화가가 되기 위해 빈 미술아카데미에 다녔지만, 집안이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했던 클림트는 14세 때 빈 응용미술학교에 입학했어요. 빈 응용미술학교는 실용품을 만드는 장인을 양성하는 곳으로, 그의 아버지가 금 세공 일을 배웠던 곳이기도 했지요. 클림트가 훗날 무늬가 가득하고 금박이 입혀진 그림을 많이 남긴 이유는 이곳에서 받은 교육과 아버지의 영향 때문이었을 겁니다.

신진 화가 시절 클림트는 빈 고전 미술의 대가 한스 마카르트와 함께 당시 새로 지어진 빈 미술사박물관 내부를 그림으로 장식하는 일을 맡았어요. 이 작업을 할 때는 클림트도 마카르트의 고전적인 화풍을 따랐지만, 이후부터는 점차 전통에서 벗어나 미술의 혁신을 꾀했습니다. 개혁의 의지를 가진 예술가들은 클림트를 중심으로 모여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이라는 표어를 내걸며 ‘빈 분리파’를 결성했지요. 클림트와 빈 분리파 회원들은 건축적 요소와 회화적 요소, 그리고 음악적 요소까지 경계 없이 한꺼번에 경험할 수 있는 총체적인 예술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아름다운 시기의 황금빛 화가

클림트는 신앙처럼 견고하면서도 모든 것을 감싸안는 듯한 온화함을 갖춘 완전한 사랑을 꿈꾸었어요. 끝내 그 이상을 충족시켜줄 결혼 상대는 만나지 못했지만, 그의 곁에는 항상 의지가 되어준 삶의 동반자 에밀리 플뢰게가 있었습니다. 플뢰게는 의상실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응용미술과 순수회화의 만남을 추구하던 클림트 역시 패션 디자인에 관심이 컸어요. 플뢰게는 클림트가 그림의 모델에게 입히기 위해 디자인한 옷을 직접 만들었는데, 고객이 원하면 판매하기도 했답니다.

‘에밀리 플뢰게의 초상’(1902). /빈 박물관·노이에 갤러리·위키피디아

인물화의 얼굴과 의상의 장식 무늬가 결합된 클림트 고유의 화풍은 1902년 실물 크기로 제작한 ‘에밀리 플뢰게의 초상화’(작품 2)에서 처음 완성됐어요. 플뢰게의 얼굴·손·드러난 목과 가슴은 인물화 기법으로 그려졌는데, 이와 달리 평평하게 그려진 몸은 금박과 은박을 이용한 의상 패턴으로 채워졌습니다.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 1’(1907). /빈 박물관·노이에 갤러리·위키피디아

인물화와 장식 무늬의 환상적인 결합은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화’(작품 3)에서 최고조를 이룹니다. 그림 속의 주인공은 장소라는 느낌이 묘사되지 않은 황금빛 평면 안에 갇혀 있는 듯 보여요. 클림트는 이 그림을 구상하기 시작한 1903년 이탈리아 라벤나에 있는 비잔틴 성당들을 방문했는데요. 그는 성당 내부의 모자이크 벽화를 보고 감탄했다고 해요. 온통 빛나는 금은보석으로 꾸며져 성스러워 보이고 눈부시게 아름다웠거든요.

스토클레 저택 식당의 모자이크 벽화(1912). /빈 박물관·노이에 갤러리·위키피디아

그것에 영감을 받은 작품이 스토클레 저택 벽화(작품 4)입니다. 그는 우아한 넝쿨 곡선을 주된 무늬로 삼아 흰색 대리석 바탕에 모자이크 기법으로 금·산호 등을 붙였어요. 1912년 완성된 스토클레 벽화는 ‘키스’(1907~1908)나 앞서 언급한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화’와 함께 황금빛으로 빛나는 클림트의 대표작이랍니다.

1918년 1월 11일 클림트는 쉰다섯 나이에 뇌졸중으로 쓰러졌어요.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당시 전 유럽을 휩쓸었던 스페인 독감에 걸린 그는 같은 해 2월 6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클림트가 활약하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약 20년 정도 기간을 유럽에서는 ‘아름다운 시절’이라고 부른답니다. 프랑스어로는 벨 에포크(Belle Époque)라고 하지요.

하지만 이후 1914년과 1939년 터진 제1·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아름답고 평화로운 시기는 상처를 입게 됐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사라져버린 찬란하고 눈부셨던 예술의 전성기를 후대 사람들은 두고두고 아쉬워하고 그리워했어요. 오스트리아의 클림트는 그토록 붙잡고 싶은 벨 에포크의 정점에 있던 황금빛의 화가로 여겨진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