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러시아 연해주에서 전개된 항일독립운동을 기리기 위해 세운 ‘신한촌(新韓村) 기념탑’ 관련 뉴스가 전해졌어요. 20년 넘게 현지 당국에 정식 등록되지 않은 시설물인 것으로 확인됐고, 그렇다 보니 관리 부실 우려가 크다는 내용이었죠. 이 기념탑은 1999년 사단법인 해외한민족연구소가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롭스카야 거리에 세운 것이에요. 기념탑 관리는 블라디보스토크 한 고려인단체 회장이 임의로 맡았고, 2019년 그가 별세한 뒤로는 부인이 대신 관리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소유 주체가 불명확해 기념탑이 제대로 보존되지 않는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어요.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한국총영사관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작년 말부터 블라디보스토크시와 논의를 벌이는 등 여러 방면으로 노력 중이라고 해요. 우리가 이 기념탑을 유지·보존해야 하는 이유는 이곳이 국외 항일독립운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기념탑을 제작할 때 모든 석재(石材)를 한국에서 가져가기도 했고요. 과연 우리 선조들은 이곳에서 어떠한 생활을 했을까요?
◇환대받던 조선인, 불청객으로 전락
러시아는 크게 8개 연방 관구(Federal District)로 구성돼 있어요. 그중 가장 동쪽에 있는 극동 지역이 하나의 연방 관구를 이루고 있죠. 이 지역은 러시아 전체 면적의 40.6%를 차지할 정도로 매우 커요. 이 극동 연방 관구 안에는 연해주·하바롭스크·사할린 등 11개 행정구역이 있습니다. 이 중 연해주는 한반도와 가장 근접해 있는 곳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이주해 정착한 곳입니다.
연해주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적극 이주하기 시작한 건 조선 후기부터였어요. 세도정치로 혼란이 심화되고 부정부패와 농민 수탈이 만연하면서 많은 사람이 국외로 이주하기 시작했죠. 특히 1860년대 후반 연이은 대흉년으로 국경 지방의 농민 약 6000명이 북간도와 연해주에 정착하게 됩니다.
1861년 러시아가 이민 규칙을 제정하면서 이주 한인들은 영구적인 인두세(人頭稅·납세 능력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머릿수에 따라 일률적으로 매기는 세금) 면제, 20년 간의 토지세 면제 혜택을 받았고 일정 기간 거주하면 러시아 국적도 취득할 수 있었어요. 또 러시아 농민과 마찬가지로 한 가구 당 일정량의 토지를 부여 받았어요. 러시아 정교를 믿어야 하는 조건이 있긴 했죠. 그래도 러시아 당국은 한인 이주자를 매우 호의적으로 받아들였어요. 그 이유는 경제적인 목적 때문이었어요. 개발돼 있지 않고 인구밀도도 매우 낮았던 연해주는 노동력 공급이 절실한 상황이었거든요. 또 사람들이 많이 정착할수록 극동 지역이 안정될 거란 계산도 있었어요. 1882년 연해주 지역의 한인 수는 1만137명으로 연해주 지역 전체 인구의 10.9%를 차지하며 러시아인 수를 넘어섰습니다. 그렇게 연해주는 한인들 덕에 경제적 발전을 거듭할 수 있었어요.
그러나 이 무렵, 당국은 ‘러시아인을 위한 러시아’라는 구호를 내세웁니다. 적극적인 러시아인 이주 장려책으로 1882년 연해주 전체 인구의 9%에 불과하던 러시아인 수는 1908년 70%(38만명)를 넘어서게 되죠. 그러면서 한인들의 이주에 대해서는 정식으로 규제가 가해지기 시작했어요. 일제의 침탈이 가속되면서 연해주로 이주하는 한인들은 늘어났지만, 타지에서 외롭게 고생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5가구 한인 마을, 항일운동 전진기지로
하지만 한인들 수가 늘어나면서 그들만의 끈끈한 공동체도 생겨났어요. 연해주에서도 한인들의 중심지가 된 곳은 바로 현재 연해주의 행정 중심지이기도 한 블라디보스토크였어요.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어로 ‘동방을 점령하라’는 뜻을 지닌 곳으로 하바롭스크 다음으로 큰 항구도시예요. 그 이름의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군사적 목적으로 중요성이 커진 곳이었죠. 물론 이곳은 군사 요충지뿐만이 아니라 어업 전진기지, 극동 지역 문화 중심지 역할도 하면서 그 위상이 크게 올라갔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해삼이 많이 나 한인들 사이에서는 ‘해삼위(海蔘威)’라고도 불렸어요. 블라디보스토크에 이주한 초기 한인들은 대부분 노동자로, 1860년대 시작된 블라디보스토크 항만과 도시 건설, 벌목 사업 등의 일자리를 찾아 왔어요. 1874년 처음 이주한 한인들은 5가구에 불과했으나 차츰 일거리가 늘어나면서 인구도 증가했고 1891년에는 840여 명에 이르렀죠. 1893년 러시아는 한인들의 집단 거주지를 하나의 구역으로 설정했고, 이곳에서 점차 요식업·숙박업이 발달하기 시작했어요. 그들만의 거리도 생겨났지요.
그런데 1911년 러시아 당국은 ‘콜레라 근절’이라는 위생상 이유를 들어 블라디보스토크 중심지에 살고 있던 한인들을 강제로 이주시키고 한인 마을을 철거해버립니다. 결국 한인들은 변두리로 쫓겨나 새로운 한인촌을 형성할 수밖에 없었어요. 이곳이 바로 후일 ‘신한촌’이라 불린 항일독립운동 중심 기지가 됐습니다. 1915년 신한촌의 한인 수는 약 1만 명에 달했고,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기 전까지 러시아 한인사회를 대표했습니다.
권업회(勸業會)
신한촌에서 전개된 항일독립운동의 중심에는 1911년 세워진 권업회(勸業會)가 있어요. 이름만 보면 순수 경제활동 단체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일제와 러시아의 감시를 피하기 위함이었고 실제로는 독립운동에 적극 앞장섰습니다. 회장에 최재형, 부회장에 홍범도가 선임됐고 ‘권업신문’ 발간, 한인학교의 설립과 강좌개설, 러시아 국적 취득 알선 등을 추진했어요. 한때 회원이 8000 명이 넘었지만 1914년 1차 대전이 발발하고 일본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한 러시아에 의해 강제로 해산됐죠. 이외에도 이 지역에는 한인들을 위한 학교인 한민학교, 독립전쟁 준비를 위한 대한광복군정부 등이 만들어지기도 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