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발생한 튀르키예 강진 후 복구 작업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어요. 또한 세계 각국에서 튀르키예를 향해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있죠. 심지어 100년도 넘은 오랜 갈등으로 끊겼던 튀르키예와 아르메니아 간 국경이 열리며 아르메니아를 통해 100톤에 달하는 식량과 의약품 등 구호 물품이 전달됐어요. 아르메니아는 튀르키예에 구조대도 파견했습니다.
이웃 국가인 튀르키예와 아르메니아는 ‘아르메니아 대학살’ 책임 소재를 둘러싼 분쟁으로 오랜 시간 앙숙 관계에 있었어요. 아르메니아 대학살이란 튀르키예의 전신인 오스만 제국 당시에 아르메니아인들이 대규모로 숨진 사건을 말해요. 세계 각국에서는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제노사이드(genocide·고의적으로 민족·종교 집단의 일부를 제거하는 것으로 학살의 한 형태)’로 규정하고 있지만, 튀르키예 정부는 이를 부인하고 있죠. 그 당시 어떠한 일이 일어났던 걸까요?
◇오스만의 소수자 박해
아르메니아인들은 기원전 6세기쯤부터 흑해·카스피해·지중해 사이의 지역에서 하나의 민족을 이루어 살고 있었어요. 그리고 4세기 초,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이며 로마 제국보다 앞선 최초의 기독교 국가가 됐습니다. 항상 독립국을 유지한 것은 아니었지만, 다른 민족과 구별되는 문화·언어적 관습을 가지며 살아갔어요.
그러나 14세기 아르메니아인의 왕국이 무너지며 아르메니아 영토 대부분이 오스만 제국으로 넘어갔어요. 아르메니아인은 무슬림이 아닌 기독교를 믿는 소수자였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 아래에서 이등 시민으로 차별 대우를 받았어요. 금융업과 같이 무슬림에게 금지된 분야에서 활동하긴 했지만, 그들의 생명과 재산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죠. 그런데 점차 서유럽에서 등장한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이념이 유입되며 아르메니아인들의 민족의식이 성장했어요.
반면 오스만 제국은 급속도로 쇠퇴했고, 1894~1896년 술탄 압둘 하미드 2세는 ‘통치권 안정’ 명목으로 아르메니아인들을 강제로 개종시키거나 학살했습니다. 이때 20만명이 넘는 아르메니아인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1차 대전과 아르메니아의 중립 선언
이 학살은 시작에 불과했어요. 1908년 청년 튀르크당은 오스만 제국의 잔재 극복을 내세우며 혁명을 일으켜 새 정권을 세웠어요. 그러나 실제로는 배타적 국수주의로 흘러갔어요. 그러면서 이전의 오스만 제국 같은 다민족·다종교 국가의 모습은 사라졌죠.
그러던 중 1914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왕위 후계자가 세르비아계 민족주의자에게 암살된 사건을 계기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납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하자 독일이 동맹 관계였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편에 섰어요. 이에 러시아가 가까운 사이였던 세르비아 편을 들었고 러시아와 한편인 영국·프랑스가 줄줄이 전쟁에 뛰어들었어요. 당시 오스만 제국은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편에 서서 참전했어요. 오랜 앙숙이었던 러시아의 반대쪽에 설 수밖에 없었던 거죠. 당시 오스만 제국 영토 내에는 아르메니아인이 약 210만명 살고 있었지만 러시아에도 약 170만명에 이르는 아르메니아인이 살고 있었어요. 아르메니아인이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가운데 어느 한쪽을 지지하는 것이 매우 위험한 선택이었어요. 그래서 중립을 선언했죠.
오스만 제국은 ‘중립’은 자신들의 편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아르메니아인들이 반란이라도 일으켰다가는 매우 위험한 상황에 이를 것이라고 판단했어요.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와 벌인 전투에서 연이어 지면서 수세에 몰리자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미움이 더욱 커졌습니다.
◇본격적인 학살로 많게는 300만명 희생
오스만 제국의 실권자들은 아르메니아인들을 없앨 기회를 엿보고 있었어요. 그러다 1915년 4월,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징집 명령을 내리는데 아르메니아인들이 이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반(Van) 지역에서 학살을 시작했어요. 반은 아르메니아인이 약 10만명 정도 살던 곳이었는데 학살 이후 그 수가 5만5000명으로 줄었습니다. 이후 본격적으로 곳곳에서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집단 학살이 진행됐어요. 오스만 제국 정부는 아르메니아인 지도자·엘리트들을 반국가 활동 혐의로 체포하고 처형했어요.
또 아르메니아인들이 러시아와 연결되면 위험하다는 생각에 아르메니아인들을 강제로 이송할 수 있는 법을 만들었어요. 동쪽에 살고 있던 아르메니아인들을 시리아 등 지내기 어려운 서쪽 사막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어요. 강제 이주가 진행되는 도중 성인 남성들은 청년 튀르크당 관료들과 정보원들의 명령에 따라 행렬에서 따로 분리돼 인근의 한적한 장소로 끌려가 학살됐어요. 여성과 어린이들은 계속 산을 넘고 사막을 건너는 험한 여정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갔어요. 기록이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지 않아 정확한 수를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아르메니아는 300만명 정도의 희생자가 발생했다고 보고 있어요. 반면 튀르키예 정부는 그 수가 과장됐다고 말하고 있고요.
◇학살 후 해외로 흩어진 아르메니아인
아르메니아 학살 소식은 점차 세계 각국에 알려졌어요. 연합국은 세계대전이 끝나면 오스만 제국이 처벌받을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경고했지만, 국제 법정이 열리지는 않았습니다. 튀르키예 국내에서 1919년 1월 시작해 400명 가까운 사람이 아르메니아인을 상대로 한 범죄 혐의로 체포됐지만, 학살의 실질적인 최고 책임자들은 이미 해외로 도피한 후였어요. 또한 강경한 성향의 튀르크당 인사들은 오히려 살아남은 아르메니아인들에게 보복성 학살을 자행했어요. 그렇게 1923년 튀르키예 공화국이 공식적으로 선포될 때까지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학살은 계속됐습니다.
지금도 아르메니아 본국에 사는 아르메니아인보다 해외 각지에 거주하는 아르메니아인이 많아요. 20세기 초에 일어난 비극으로 삶의 터전을 빼앗겼기 때문이죠. 매년 4월 24일(제노사이드가 시작된 날)이 되면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아르메니아인들은 선조의 비극을 추념해요. 1965년 우루과이가 처음으로 아르메니아 집단 학살을 인정한 이후 여러 국가가 이를 인정하고 있어요.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2019년 이 사건이 집단 학살에 해당한다고 선언했고, 2021년에는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이를 제노사이드로 규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