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

백수린 지음 l 출판사 창비 l 가격 1만4000원

소설가의 일상을 엿볼 수 있는 에세이입니다. 살고 있는 동네와 집을 중심으로 작가의 일상을 조곤조곤 말해줘요. 저자가 소설가이니만큼 다양한 문학 작품을 인용하고 있어 이 에세이에 언급된 다른 책을 계속해서 읽어 나가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를 할 수도 있습니다. 독서 경험 자체를 확장시킬 수 있지요.

이 책을 쓴 백수린 작가는 소설도 쓰고 번역도 합니다. 저자가 쓴 소설은 우리나라 문학계에서 주목받고 있습니다. ‘폴링 인 폴’ ‘참담한 빛’ ‘여름의 빌라’ 등 한번쯤 시간을 내 읽으면 좋을 소설을 썼어요. 현대문학상, 이해조소설문학상, 젊은작가상 등 다수의 문학상도 받았지요.

이 책 1부는 작가가 살고 있는 동네와 집에 관한 이야기로, 2부는 산책을 하며 느낀 단상으로 구성돼 있어요. 특히 인상 깊은 부분은 3부 ‘멀리, 조금 더 멀리’입니다. 성장하는 내내 자신만의 목소리를 갖지 못했던 저자는 리베카 솔닛이라는 미국 작가의 책을 읽으며 자신에게도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 낼 힘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해요. 리베카 솔닛과 그의 작품에 대해 자세히 서술하고 있어 이 에세이를 읽으면서 이 책의 저자뿐만 아니라 리베카 솔닛이라는 작가에 대해서도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자가 일상에서 겪는 일을 통해 그의 소설관에 대해서도 알 수 있어요. 동네에서 폐지를 수집하는 노인과 대화하면서 저자는 노인에 대해 우월감을 느꼈다고 털어놓아요. 이 일화에서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을 사물화할 수밖에 없는 ‘소설 쓰기’의 한계와 그에 대한 백수린 작가의 고민을 엿볼 수 있어요.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희망이에요. ‘작가의 말’에는 이런 내용이 있어요. 시간이 많은 것들을 사라지게 하더라도 저자에게는 글이 있어 ‘잃었던 것과 몇 번이고 다시 함께할 수 있으니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요. 예전에 저자는 이렇게 생각했대요. ‘애써 노력해봤자, 소중한 것은 우리가 돌보길 그치는 순간 얼마나 쉽게 상해버리고 망가지고 마는지. 없애야 할 것들은 반면 얼마나 끈질기고 집요한 생명력을 지녔는지. 마치 비관적인 생각이나 낙담으로 기우는 마음, 미움과 오해, 깊은 곳에 숨겨둔 열등감처럼.’

하지만 이제 저자는 ‘살아 있는 것들 쪽으로 시선을 옮긴다’고 말해요. ‘제한된 돌봄의 능력 바깥에서 태어나 세상의 빛을 본 것들. 내가 멈춘 그 순간에 뜻밖의 선물처럼 주어진 생명들’에 시선을 주는 작가의 문장이 다정하게 느껴져요. 더 이상 ‘내’가 전부이지 않은 세상을 꿈꾸며 내가 심지 않은 것들이 피어날 땅을 남겨두며 살고 싶다는 작가의 문장에서 ‘나’가 아닌 ‘우리’의 세상을 희망하게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