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지 지음 l 출판사 사람in l 가격 1만5000원

지난주 수요일은 ‘더위가 그친다’는 뜻의 처서(處暑)였어요. 처서가 지나면 여름 더위가 한풀 꺾이고 선선한 가을이 오지요. 이 책은 다가오는 가을과 잘 어울리는 ‘작은 이야기 모음집’이에요. 시인의 눈으로 새롭게 바라본 단어들을 골라 정리했죠. 노란 책 표지가 황홀하게 춤을 추며 떨어지는 가을날 은행잎을 닮았어요. 책장을 넘기다 보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가을로 물들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이 책은 봄·여름·가을·겨울 등 계절 이름을 딴 4장으로 돼 있어요. 요즘 같은 시기엔 2장 ‘여름, 선명한 마음으로’부터 읽기 시작해, 3장 ‘가을, 열리는 마음으로’를 이어 읽으며 새로운 계절을 차분히 맞이하면 좋겠지요.

3장에 수록된 단어를 몇 가지 살펴볼까요? 가을은 역시 수확의 계절이죠. 자연스레 ‘열매’가 제일 먼저 떠오릅니다. 시인은 ‘열매’라는 단어 앞에서 사람이 맺을 수 있는 열매를 헤아려봐요. ‘한 사람 한 사람이 열매라고 생각하면 존재 자체가 이미 큰 성취’라고 합니다. 그러니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좋아질 거라는 믿음의 씨앗이 내 안에 있는 것처럼 굴어야 한다’고 말해요. ‘나는 열매이고, 그것을 증명하는 일은 오직 내가 열매라고 믿는 일뿐이라는 듯’ 말이죠.

가을 하면 또 무엇이 떠오르나요? 무르익은 감만큼 아름답게 물든 감나무 잎도 볼 수 있죠. 온 세상이 무르익고 물드는 가운데 그 풍경을 따라 깊고 짙어져야 할 것 같은 느낌도 들어요. 그런 의미에서 떠오르는 과일로 ‘감’이 있지요. 시인은 감에 대해서도 조곤조곤 이야기를 풀어놓아요. ‘단감도 될 수 있고, 곶감도 될 수 있고, 홍시도 될 수 있는’, 그야말로 모든 가능성을 지닌 채 주렁주렁 열려 있는 감에 대한 짧은 생각을 전하지요. 감을 수확할 때 몇 개는 따지 않고 까치밥으로 둔다고 하죠. 몇몇 가능성을 남겨두는 배려인 셈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가능성을 조금씩 세상과 나누는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져요.

이 책은 섬세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시인이 직접 고른 단어 110개를 담고 있어요. 단어에 대한 시인의 생각이 마치 시처럼 스며들어 깊은 여운을 전하죠. 그동안 꿈, 사랑, 평화, 희망 같은 관념어가 어렵게 느껴졌다면, 단어 뜻은 잘 아는 것 같은데 막상 설명하려고 할 때는 그저 어렴풋하게 느껴졌다면 이 책을 펼쳐보세요.

책을 다 읽은 뒤 각자 마음속에 좋아하는 단어가 있는지 떠올려봐요. 마음에 드는 단어를 깨끗한 종이에 옮겨 적고, 스스로 생각하는 단어의 모습을 적어 보세요. 하나의 단어를 깊이 이해하고 나면 세계를 이해하는 폭이 넓어진답니다.

김미향 출판평론가·에세이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