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대 서울의 시장 풍경. /서울역사아카이브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이 경기 김포시를 서울에 편입시키는 방안을 거론하고 있어요. 서울은 조선 건국 초기만 해도 ‘한양 도성 내’를 의미했는데, 17~18세기에는 도성 밖으로 범위가 확장되고 인구가 급격하게 늘어났어요. 17~18세기 서울의 팽창과 도시 구조 변화를 알아보겠습니다.

조선 건국 초기 서울

조선 건국 초 서울은 개성보다 훨씬 작은 도시로 건설됐습니다. 건설 책임자 정도전은 길이 18.2㎞의 서울 성곽을 쌓고, 그 안에 종묘와 사직단, 궁궐과 관청, 성균관, 시장 등을 건설했어요. 양반 관료는 살기 좋고 출근 거리가 가까운 북촌 지역에 자리를 잡았고, 인구는 대략 5만여 명으로 추정해요.

조정은 주로 한강 물길을 이용해 전국에서 거둔 곡식과 특산물을 서울로 운반해 재정으로 충당했어요. 도성 안에는 크고 작은 농지와 목장도 있었어요. 나무를 땔감으로 사용해 난방을 했고, 사람 분뇨와 재는 농지에서 거름으로 사용했죠. 서울 인구와 도시 구성은 크게 변하지 않고 약 200년간 유지됐다고 할 수 있어요.

인구가 팽창하는 서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17세기 소(小)빙하기 기후 때문에 세계적으로 나타난 흉년과 전염병으로 유랑하는 농민이 증가했습니다. 자연재해가 계속되자 정부는 비변사 아래 진휼청을 두고, 이를 중심으로 경제 관련 기구를 모두 통합해 유민(流民)을 구제했어요. 전국에서 유민이 서울로 몰려들었어요. 정부는 유민을 고향으로 돌려보내거나 경기 연해 여러 섬에 가서 살도록 했으나, 유민은 서울에 눌러사는 것이 일반적이었어요.

1910년대 돼지를 등에 메고 장에 가는 행상인. /서울역사아카이브

한성부 공식 통계에 따르면 서울 인구는 1648년(인조 26) 9만5569명에서 1669년(현종 10) 19만4030명으로 급증했어요. 인구 파악을 철저히 한 결과이기도 했지만, 유민이 서울로 몰려든 일도 무시할 수 없어요. 서울 인구 추세를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1720년대 25만명, 1770년대 30만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어요.

서울로 몰려든 유민은 도성 안뿐 아니라 상업이 번성한 한강 유역과 도성 밖에도 터를 잡고 살기 시작했어요. 도성 안에 자리를 잡은 유민은 청계천 주변이나 개간이 금지된 남산 등지에 모여 살았어요. 정부는 성저십리(城底十里·성 밖 4㎞ 지역) 내 산지 개간을 엄격히 금지했으나, 18세기 중엽 이후에는 만리현·서빙고 등지 여러 산이 개간됐어요. 도성 밖에서 급속하게 마을이 발달한 지역은 마포·용산·서강 등 한강 주변과 동대문 밖 왕십리가 대표적이었어요.

18세기 중엽에 이르면 도성 밖에 거주하는 인구가 서울 인구 절반에 이르렀어요. 정부는 인구가 늘고 새로 마을이 생겨나자 행정구역을 재편했어요. 한성부 행정구역은 도성과 성저십리를 중심으로 5부 49방 체제였는데, 17세기 후반에는 남부에 두모·한강·둔지방, 서부에 서강·용산방을 신설했어요. 18세기 후반에는 북부에 상평·연희·연은방, 동부에 경모궁방을 신설했어요. 또 도성 외부에 정착할 수 없었던 유민은 경기에서 상업이 발달한 누원점(현재 도봉구 일대)과 송파 등지에 정착하기도 했어요.

서울 인구 중심은 상인

인구 팽창기 서울 인구는 직임자(관료), 서리(문서 기록과 관리를 맡던 하급 관리), 공인(중앙 관청에 물자를 조달하던 상인), 시전 상인, 군병, 영세 소상인, 수공업자, 한잡지류(閑雜之類)로 구분됐어요. 이 중 농사를 짓지 않고 장사나 품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한잡지류가 절반 이상을 차지했어요.

1920년대 서울 중구 수표교(水標橋) 근처 청계천변의 모습. /서울역사아카이브

실제로 18세기 후반 서울 인구 중 상인이 가장 많았어요. 상인은 시전 상인과 영세 소상인, 군인이면서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로 구분할 수 있어요. 18세기 후반 각기 독립된 동업 조합으로 조직돼 있었던 시전(국가 허가를 받은 상설 시장)은 120여 곳 정도였어요. 각 조합에 속한 상인은 수십~수백 명이었다고 추정하고 있어요. 시전 하나에 속한 평균 상인을 대략 100명으로 추정한다면, 시전 상인이 1만2000명 안팎 있었던 셈이죠. 이들의 가족까지 합치면 약 5만명이 시전과 관련된 인구라고 파악할 수 있겠지요. 시전에서 물건을 떼어다가 일반 소비자에게 판 영세 소상인을 합치면 상인 인구는 더 늘어납니다.

영세 소상인이 판매한 상품은 어물(생선이나 생선을 가공한 것), 쇠고기, 돼지고기 등이 많았어요. 쇠고기 판매업에 종사하는 상인은 1724년(영조 즉위년) 5000명에 이르렀고, 돼지고기 판매처는 70여 곳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어요. 영세 소상인 수는 수만 명에 달한다고 보고 있죠.

서울에서 군역에 종사하는 인구는 약 2만여 명이었어요. 이들은 군역 대가로 받은 군포로는 생계를 꾸려갈 수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상업에 종사했어요. 군병들은 군포(옷감)와 쌀 등을 주로 판매했고, 특히 금난전권(시전 상인이 무허가 상인을 금지할 수 있었던 권리)을 적용받지 않았기 때문에 가족이 상업에 종사하기 유리했어요. 정조 시기 ‘상업으로 살아가는 자가 10중 8, 9′라는 기록은 다소 과장된 표현이라고 해도, 18세기 서울 인구 중심이 상인이었다는 점은 분명해요.

사산금표도(四山禁標圖) 일부. 사산금표도는 서울과 성저십리(城底十里) 내에서 금지된 매장, 채석, 벌목 등 행위를 감시하기 위해 군영별 감시 구역을 표시한 지도예요. /서울역사아카이브

18세기 이후에는 도성 밖에 상업적 농업 지대가 형성됐어요. 농민은 동대문과 서대문 밖에서 미나리, 독립문 주변에서 무와 배추, 살곶이다리(청계천과 중랑천이 만나는 지역에 지은 다리) 주변에서 순무, 석교(서대문구 영천시장) 주변에서 가지와 오이, 연희동에서 고추와 부추, 이태원에서 토란 등을 재배했어요. 이 외에도 충정로에서 만리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에서는 각종 약초를, 인왕산 지역에서는 살구, 창신동에서는 복숭아와 앵두, 종로 세검정에서는 자두, 동숭동에서는 잣나무 등을 재배했어요.

17~18세기 서울로 유민이 모여든 것은 자신이 사는 곳보다 어떻게든 먹고살 생계 수단이 있고, 부를 축적할 기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서울과 수도권 인구가 급증하는 이유는 오늘날이나 17~18세기나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