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6일 북한과 일본은 평양 김일성 경기장에서 축구 국가대표 경기(A매치)를 치른다고 합니다. 북한에서 A매치 경기가 열리는 것이 4년여 만입니다. 2019년 10월 한국과 2022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 경기를 김일성 경기장에서 치른 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한국이나 다른 나라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평양은 매일 뉴스에 나오지만 가장 멀고 잘 모르는 도시라고 할 수 있지요. 지금의 평양은 어떻게 만들어진 걸까요? 일제강점기로 돌아가 당시 평양 지역의 정치·사회적 특징을 알아보고, 이어서 해방 이후 평양에서 일종의 임시정부 기능을 맡았던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의 활동을 살펴보겠습니다.
기독교 중심지였던 평양
평양은 한때 기독교의 중심지였습니다.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평안남도의 서남부 지역, 특히 평양을 중심으로 기독교 신자가 많았습니다. 이 지역의 기독교계 지도자와 주민은 종교계 사립학교(미션스쿨·mission school) 설립에도 적극적이었어요. 그만큼 종교열이 높았던 거죠. 1910년 통계에 의하면 전국 종교계 사립학교 751곳 중 평안남도에만 255곳(34%)이 있었어요. 평양에 세워진 대성학교, 숭실학교 등이 유명했습니다.
평안남도 출신 학생은 다른 지역에 비해 이공계 전공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해요. 당시 평양에서 기독교 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던 안창호(1878~1938)의 가르침이 지역 학생에게 널리 퍼졌기 때문으로 보여요. 안창호는 교육 단체인 흥사단을 조직하고, 한 사람이 한 가지의 전문 기술을 가져야 한다는 ‘1인 1기’ 방침을 강조했어요. 이처럼 실용 기술을 중시하는 안창호의 영향으로 당시 평양과 평안남도에서는 사회주의나 민중운동에 거부감이 심한 편이었다고 합니다.
유학파가 아닌 국내파에서 평양 지역을 대표하는 정치인은 조만식(1883-1950)입니다. 조만식은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상업에 종사하다가 러·일전쟁(1904~1905) 중 기독교 신자가 됐어요. 평양의 장대현 교회에 출석하면서 1905년 늦은 나이인 23세에 평양의 기독교 학교인 숭실학교에 입학해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숭실학교 시절에는 안창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해요. 1906년에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1913년 귀국한 뒤 조만식은 기독교계 독립운동가로서 우리 돈으로 대학을 짓자는 ‘민립대학 설립 운동’, 우리 물건을 많이 사서 우리 산업을 키우자는 ‘조선 물산장려 운동’ 등을 주도했어요.
해방 직후엔 민족주의자 조만식이 앞장
조만식은 1945년 8월 해방 후 평양에서 새 정부 구성을 추진하는 역할을 맡게 됩니다. 해방 전 조만식은 당시 일제가 조선인 전쟁 참여 선전을 강요하자 평양을 떠나 고향에 은거하고 있었죠. 해방 당일 평안남도 도지사였던 일제 관료 후루가와가 우리나라 민족 지도자인 조만식과 만나 앞으로 평양의 치안 유지를 어떻게 해야 할지 협의하기 위해 불렀으나, 조만식은 이 만남을 거절했어요. 하지만 16일 서울에 정부 수립을 의논하는 단체인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가 구성됐다는 소식을 접한 뒤, 조만식은 또 다른 민족 지도자 오윤선 등과 합류해 17일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이하 평남 건준)’을 조직합니다.
조만식은 ‘건국준비위원회’라는 명칭을 쓰고 싶지 않았다고 해요. 대신 ‘치안유지위원회’라는 명칭이 적절하다고 생각했죠. 조만식은 평남 건준이 정부를 조직하기 위한 모임이 아니라 정부가 들어서기 전 치안 유지 기능을 담당하는 임시 기구라고 여겼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서울에서 먼저 사용한 건준이라는 명칭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해요.
평남 건준에는 조만식을 비롯한 민족주의 인사가 다수였어요. 사회주의나 민중운동에 친화적인 ‘좌익’으로 분류되는 인물은 이주연, 한재덕, 김광진 정도이고, 이들마저도 공산주의 활동은 미미했어요. 당시 공산주의 진영에서 17일 ‘조선공산당 평남지구위원회’란 별도 단체를 만들었기 때문에 좌익 인사들이 평남 건준에 불참했지만, 조만식 등은 평남 건준에도 좌익의 참여를 최대한 이끌어내려고 했다고 합니다.
평남 건준에 참여한 인사들의 또 다른 특징은 대부분이 기독교 신자였다는 점이에요. 3·1운동, 조선 물산장려 운동과 같은 비폭력적인 독립운동에 참여한 인사가 많았죠. 반면 공산주의 계열은 무장투쟁을 중시했었답니다. 평남 건준 참여 인사들은 대부분은 지주나 사업가였어요.
평남 건준은 조직 후 치안 유지 활동에 중점을 두었어요. 조만식은 17일 성명을 통해 일본인에 대한 보복 금지, 일본인의 재산 보호, 친일 인사에 대한 보복 금지 등을 발표했어요. 해방 후 소련군이 진주하기 전 약 10일간 평양에서는 일본 신사가 불태워지는 것 말고는 큰 사고가 없었어요. 그러나 평남 건준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게 됩니다.
소련군 들어오더니 “공산당 지도 받아라”
소련군은 8월 26일 평양에 들어왔어요. 그리고 소련군 치스차코프 사령관 등은 29일 평양 철도 호텔에서 평남 건준, 조선공산당 평남지구위원회 위원들과 회담했어요. 군인 출신으로 평양의 정치 상황에 어두웠던 치스차코프 사령관은 조만식에게 “이제부터는 공산당의 지도를 받으라”는 무리한 요구를 했고, 이에 조만식과 평남 건준 위원들이 거부하면서 큰 성과 없이 회의를 마쳤다고 해요.
30일 소련 측은 소련군, 평남 건준, 조선공산당 평남지구위원회가 다시 모인 자리에서 평남 건준에 해체를 요구해요. 평남 건준이 우익 중심으로 조직됐기 때문에, 우익과 공산당이 같은 비중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어요. 결국 평남 건준에서 제출한 16명, 공산당 측에서 제출한 16명, 총 32명으로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가 조직됐어요. 평안남도에서 건국을 준비하는 통합 단체라고 할 수 있죠. 광복 직후 조직된 평남 건준은 우익 중심의 민족주의자, 기독교인 등이 중심이었어요. 소련군 진주 후 우익과 좌익이 같은 비중으로 개편된 거예요.
이환병 관악고 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