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한글박물관이 6월 호국 보훈의 달을 맞아 한글을 통해 세상을 일깨운 ‘한글 보훈 인물’ 10여 명을 선정했어요. 이 중에 유일한 외국인이 한 명 있는데요. 바로 미국인 선교사이자 교육자였던 호머 헐버트(1863~1949)입니다.

작년 국가보훈부가 제104주년 3·1절을 맞아 헐버트의 흑백 사진을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해 색채 사진으로 복원한 모습. /국가보훈부

안중근 의사는 뤼순 감옥에서 일본인 경찰의 취조를 받을 때 “한국인이라면 헐버트를 하루도 잊어서는 아니된다”고 말했어요. 헐버트가 한국을 위해 분개하고 각국에 한국을 알리려 노력한 일을 높게 평가하며 존경의 뜻을 표한 것이었죠.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프린스턴대 유학 시절 “헐버트는 다른 외국인들과 다르다. 헐버트야말로 지성과 인품을 겸비한 진정한 한국의 친구다”라고 말했다고 해요. 헐버트는 우리나라에서 어떤 활동을 했기에 이러한 평가를 받는 것일까요?

조선으로 가는 배에 오르다

헐버트는 미국의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났어요. 다트머스대를 졸업하고 유니언 신학대에서 공부를 하던 23세의 헐버트는 1886년 조선으로 가는 배에 오릅니다. 조선 최초의 근대식 공립학교인 육영공원에서 영어 교사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자원한 것이죠.

헐버트는 육영공원에서 영어와 지리 등을 가르쳤어요. 학생들에게 5대양과 6대주가 포함된 세계지도를 보여주며 넓은 세계에 대해 설명해 줬다고 합니다. 학생들은 새로운 세계에 흥미를 보이며 자연스럽게 영어에 관심을 가지게 됐습니다. 헐버트는 학생들이 영어 발음을 제대로 익히는 것을 강조했다고 해요. 영어 문장을 암송하도록 하고, 암송을 다 못 하면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 고종은 근대 교육에 관심이 많았어요. 경복궁에 육영공원 학생들을 불러 영어 시험을 치르기도 했어요. 고종이 영어 문제를 직접 읽고 학생들이 답안을 작성하는 모습을 본 헐버트는 깜짝 놀랐어요. 고종은 영어를 읽을 줄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한글로 표기된 발음을 보고 영어 문장을 읽었기 때문이었죠. 헐버트는 이런 경험 등을 통해 한글의 우수성을 깨달았다고 해요.

한글의 매력에 빠지다

헐버트는 학생들을 잘 가르치기 위해서 한글을 반드시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자비로 한글 선생님을 고용해 열심히 한글을 익혔어요. 그리고 1889년 ‘사민필지(士民必知)’라는 세계 지리 교과서를 한글로 써서 교재로 사용했어요. 사민필지는 ‘선비와 백성이 모두 반드시 알아야 할 지식’이라는 뜻이에요. 순한글로 된 우리나라 최초 세계 지리 교과서였습니다.

순한글로 된 우리나라 최초 세계 지리 교과서 사민필지 일부 내용. /한국학중앙연구원

사민필지 서문에서 헐버트는 “조선의 한글이 중국의 한자에 비해 훨씬 편리하지만 사람들이 그런 줄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업신여기니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필자가 비록 조선말과 한글에 익숙하지 않은 어리석은 외국인이지만, 부끄러움을 잊고 특별히 한글로 세계 각국의 지리와 보고 들은 각국 풍속을 대강 기록하려고 한다”고 밝혔어요.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여전히 한글보다 한자를 많이 사용했는데, 외국인이 오히려 한글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며 한글 교과서를 집필한 거예요.

헐버트는 사민필지에 지구의 탄생과 기후에 대한 설명부터 5대양 6대주, 각 주에 속한 국가들의 위치와 면적, 풍속, 군사, 종교, 정치 등에 대해 쉽게 적어 놓았어요. 아직 세계 정세에 대해 잘 몰랐던 조선인의 시야를 넓혀줬습니다.

헐버트의 한글 사랑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뉴욕트리뷴’에 ‘조선어(The Korean Language)’라는 글을 기고했는데요. 이 글은 “조선에는 모든 소리를 자신들이 창제한 고유의 글자로 표기할 수 있는 완벽한 문자가 존재한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해요. 또 우리나라 최초의 영문 월간지 ‘한국소식’에 한글에 담긴 세종대왕의 애민 정신을 소개하고 한글의 우수성을 높게 평가하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한글이 과학적인 문자라는 사실을 세계 여러 나라에 알리려고 노력한 것이죠.

헐버트는 1896년 ‘독립신문’ 창간에 힘을 보태기도 했어요. 독립신문은 한글판과 영문판으로 구성돼 있었는데, 영문판 편집을 헐버트가 담당했어요. 그는 영문판 사설에서 “조선은 조선인을 위한 조선이어야 하고 (중간 생략) 한글을 쓰는 것이 창피하다는 생각을 버려야 하고, 교과서를 하루빨리 한글로 보급하여야 한다”고 밝혔어요.

한국에서 눈을 감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아 갔어요. 고종은 을사조약이 체결되기 전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헐버트를 특사로 임명해 을사조약이 무효라는 친서를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전달하게 했어요. 또 1907년 고종은 을사조약의 불법성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우리나라 외교 특사를 비밀리에 파견하려 했어요. 이때 외교 특사로 임명된 사람은 이위종, 이상설, 이준 세 사람이었는데, 고종은 헐버트를 은밀히 불러 특사 활동을 지원할 것을 부탁했어요.

서울 마포구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있는 헐버트 묘소. /위키피디아

당시 일본은 헐버트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헐버트는 네덜란드로 바로 가지 않고 스위스, 프랑스 등을 방문하며 일본의 시선을 끌었어요. 그 덕분에 이위종, 이상설, 이준 등은 헤이그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헤이그 특사단은 일본 등의 방해로 만국평화회의에 직접 참석하진 못했지만, 헐버트의 지원에 힘입어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국제사회에 호소할 수 있었어요.

헐버트는 일제에 의해 미국으로 강제 추방돼요. 그리고 광복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국빈 초청으로 광복절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다시 한국 땅을 밟았어요. 하지만 한국에 온 지 일주일 만인 1949년 8월 5일, 한평생 헌신했던 한국 땅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는 그의 평소 바람에 따라, 그는 현재 서울 마포구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안장돼 있습니다. 헐버트의 장례는 외국인 최초로 사회장으로 치러졌어요. 또 우리 정부는 1950년 헐버트의 공로를 기려 외국인 최초로 대한민국 최고의 훈장인 건국공로훈장 태극장을 추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