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한 모임에서 “삼국지 게임을 즐기는데 맹획 캐릭터를 쓴다”고 밝혔다는 뉴스가 나왔어요. 맹획은 중국 삼국시대 남만(남쪽 이민족)의 지도자로 알려진 인물로 촉한의 승상 제갈량이 일곱번 잡았다 놓아준 ‘칠종칠금(七縱七擒)’ 고사성어로 유명합니다. ‘왜 조조, 유비, 손권 같은 인기 캐릭터를 고르지 않느냐’는 질문에 “맹획으로 이기기 위해선 많은 역경을 극복해야 하기 때문”이라며 “하지만 실제 삶은 조조나 사마의가 훨씬 편안한 것 같다”고 했답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이 있어요. 많은 기사가 유비, 조조, 손권, 사마의 같은 옛 중국 인명에 대해 누구인지 전혀 설명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삼국지(三國志)’의 주요 인물이어서 이미 친숙하기 때문입니다. 삼국지는 한국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동양 고전일 텐데요. 삼국지는 언제부터 우리나라에 영향을 준 걸까요?
삼국지 읽었다고 꾸중 들은 선조 임금
서기 220년부터 280년까지 중국은 위, 오, 촉한의 세 나라로 나뉜 ‘삼국시대’였습니다. 촉한은 263년 멸망했어요. 이 시대를 정통 역사 기록인 정사(正史)로 쓴 것이 서진의 진수(233~297)가 쓴 ‘삼국지’입니다. 이 책 중에서 위서 동이전은 한국 고대사에서 아주 귀중한 사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삼국지’는 이 책이 아니라 명나라 때 나관중(1330?~1400)이 썼다는 소설 ‘삼국지연의’입니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난 후한 말 서기 184년부터 280년까지 일을 다룬 소설이죠. 등장인물은 대부분 역사 속 실존 인물이지만 그들의 능력과 사건의 규모는 무척 과장돼 있습니다. 이제부터 기사에 나오는 ‘삼국지’는 모두 ‘삼국지연의’를 말합니다.
삼국지는 고려 말 우리나라에 처음 유입된 것으로 보입니다. 16세기 중엽 금속활자로 인쇄된 삼국지도 남아 있는데, 이 무렵부터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읽혔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1569년(선조 2년) 17세 소년이던 선조 임금이 “장비(촉한의 장수)의 고함에 만군(많은 군사)이 달아났다”며 삼국지를 인용하자, 학자인 신하 기대승이 “경전을 공부해야 할 군주가 어찌 허망한 이야기를 읽으십니까”라며 꾸짖는 장면이 ‘선조실록’에 나옵니다. 선조와 기대승 모두 삼국지를 읽었던 것입니다.
같은 시기에 삼국지를 전략·전술에 응용한 무장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순신 장군입니다.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4년 ‘난중일기’에서 “밖에는 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돌 같은 인물이 없고, 안에는 계책을 세울 기둥 같은 인재가 없다” “배를 더욱 늘리고 무기를 만들어 적들을 불안하게 해 우리는 그 편안함을 취하리라”라고 썼는데, 모두 삼국지 22회에 나오는 문장을 인용한 것이었습니다.
‘조자룡 헌 창’부터 ‘방구석 여포’까지
이후 삼국지는 조선의 베스트셀러가 됐습니다. 18세기가 되면 집집에 이 책이 있었고, 그 내용이 과거시험 문제로 출제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조정에서 당쟁을 할 때 서로 상대방 진영을 향해 “조조 같은 자” “동탁(후한 말의 정치가)과 뭐가 다르냐”고 비난하곤 했습니다. 관련 유적도 있습니다. 벼룩시장으로 유명한 서울의 동묘(동관왕묘)는 중국 도교와 민간신앙에서 신으로 추앙받은 관우(유비 휘하의 장수)를 기리기 위해 17세기 초에 세워진 사당입니다. ‘중국 신’인데도 계속 관심을 받았던 것은 삼국지로 인해 잘 알려진 인물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한국 속담 중에서도 삼국지에서 유래된 것이 많습니다. ‘장비 군령이냐’는 속담은 성미 급한 장비처럼 몹시 서두른다는 뜻입니다. ‘유현덕(유비) 모양 울기만 하느냐’는 말은 착한 캐릭터지만 제갈량을 만나기 전 계속 패하고 어쩔 줄 몰라하던 유비에게서 유래된 말입니다.
‘조자룡(조운·촉한의 장수) 헌 창 쓰듯’이란 속담은 어떤 물건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하거나 마구잡이로 낭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조조는 웃다 망한다’는 자신만만하던 사람이 언제 망신당할지 모른다는 뜻입니다. ‘제갈공명(제갈량) 칠성단에 동남풍 기다리듯’은 무언가를 간절히 기다리는 모습을 말합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수록된 ‘범강장달이’란 단어는 키가 크고 우락부락하게 생긴 사람을 뜻합니다. 범강과 장달은 장비의 부하이자 장비를 살해한 자들인데, 삼국지에서 분량도 적은 인물의 이름이 한국어 어휘로 굳어졌다는 것에서 한국인이 장비의 죽음을 얼마나 안타까워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이 그저 옛날 일만은 아닙니다. 최근 신조어 ‘방구석 여포(동탁의 부하 장수)’는 사회에선 온순하면서 집 안이나 온라인에서만 공격적인 사람을 말합니다.
21세기에도 쓰이는 도원결의·읍참마속
어쩌다 한국은 이렇게 ‘삼국지의 나라’가 된 걸까요. 허우범 인하대 교수는 “한·중·일 세 나라 중에서 한국인이 삼국지를 가장 좋아하게 된 것엔 이유가 있다”고 말합니다. 사대부는 충의(忠義) 사상을 선호해 제갈량을 수퍼스타로 여겼고, 백성은 조조를 사악한 권력자로 보고 지략과 무공으로 그를 혼내주는 스토리에 매료됐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판소리 다섯 마당 중 하나가 삼국지에서 스토리를 따 온 ‘적벽가’인 것이 이해가 갑니다. 심지어 ‘흥보가’에선 놀부의 박에서 장비가 튀어나오기도 합니다.
삼국지에 등장했던 여러 고사성어는 21세기 한국의 일상생활에서도 여전히 쓰이고 있습니다. ‘도원결의(桃園結義)’는 복숭아나무 밭에서 유비·관우·장비가 의형제를 맺은 데서 나온 말로, 혈연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같은 목표를 위해 의리로 뭉치는 것을 말합니다. ‘삼고초려(三顧草廬)’는 유비가 제갈량의 초가집으로 세 번 찾아간 것에서 유래됐는데 인재를 맞아들이기 위해 참을성 있게 노력한다는 뜻입니다.
‘고육지책(苦肉之策)’은 자기 몸을 상해 가면서 꾸민 계획이라는 의미로 적벽대전 때 손권 측 장수 황개가 이 계책을 씁니다. ‘계륵(鷄肋)’은 닭갈비뼈처럼 먹을 것은 별로 없지만 버리기는 아까운 것을 비유하는 말인데, 한중을 놓고 유비와 싸우다 고전하던 조조의 상황에서 나온 말입니다. ‘읍참마속(泣斬馬謖)’은 제갈량이 명령을 어긴 부하 마속을 울면서 처형했다는 데서 나온 것으로, 큰 목적을 위해 아끼는 사람을 버린다는 뜻입니다.
이런 말들이 지금도 신문과 방송에서 별 설명 없이 자주 나오는데, 온 국민이 삼국지를 읽은 것으로 간주하는 셈이어서 흥미롭기도 합니다. 일부에선 ‘유익하지도 않은 삼국지를 왜들 그렇게 읽느냐’며 기대승처럼 비판하기도 하지만, 결국 모든 고전은 독자가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약도 독도 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