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국가유산청이 ‘신숙주 초상’을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신숙주 초상은 현존하는 공신 초상화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져요. 공신(功臣)은 나라를 위해 특별한 공을 세운 신하예요. 1455년(세조 1년) 신숙주가 공신으로 책봉됐을 때 포상으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요. 국가유산청은 신숙주 초상이 제작 당시 원형을 비교적 충실하게 보전하고 있어 미술사적으로 가치가 높고, 조선 전기 신숙주라는 인물을 묘사한 그림이라는 점에서도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다고 했습니다.
신숙주는 병조판서, 대사성, 좌의정 등을 지낸 문신으로, 뛰어난 학식과 실무 능력을 지닌 명신(名臣)으로 평가되고 있어요. 하지만 맛이 쉽게 변하는 ‘숙주나물’이 신숙주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는 설이 있듯이, 그는 절개를 저버린 변절자라는 이미지도 가지고 있습니다. 신숙주에 대해 이런 상반된 평가가 있는 배경은 무엇일까요?
전환점이 된 수양대군과의 만남
신숙주는 1417년에 태어났어요. 어릴 적부터 능력이 출중해 21세 때 생원·진사시를 동시에 합격했고, 이듬해 문과에서 3등이라는 뛰어난 성적으로 급제했죠. 관직 생활을 시작한 그는 1441년 세종의 두터운 신임과 기대를 받으며 집현전 관원으로 임명됐어요.
집현전은 국가 제도 정비와 학문 연구를 전담하기 위해 세종이 설치한 기구로 잘 알려져 있죠. 집현전 관원은 당시 가장 뛰어난 엘리트들이었어요. 성삼문, 박팽년 등 인재와 함께 신숙주도 포함됐죠. 집현전 학사로서 활발하게 활동한 신숙주는 훈민정음 창제에도 기여했습니다.
신숙주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된 사건은 바로 수양대군(1417~1468)과의 만남이었어요. 둘은 그전부터 서로 알고는 있었지만, 1452년 명나라에 함께 가면서 친분이 매우 두터워졌어요. 당시 야심이 컸던 수양대군을 명나라에 보낸 것은 일종의 좌천의 의미가 컸는데, 명나라로 떠나기 직전 수양대군은 신숙주에게 본인과 함께 다녀올 것을 제안했고 신숙주도 이를 수락했어요. 명나라를 다녀오는 동안 두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이후 정국에 대해 깊이 논의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듬해 조선으로 돌아온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일으켜 반대 세력을 제거했어요. 1455년에는 조카였던 단종을 폐위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릅니다. 바로 조선의 제7대 임금 세조입니다.
계유정난이 일어났을 때 신숙주는 외직에 나가 있었지만,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지지했던 사람들에게 내린 칭호인 정난공신에 책봉됐어요. 이후에도 여러 차례 공신에 책봉돼 출세가도를 이어갔습니다. 40세에 우의정에 올랐고, 5년 뒤엔 영의정에 임명됐어요.
한편 당시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는 신하들도 많이 있었어요. 대표적으로 성삼문, 박팽년 등 이른바 ‘사육신’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적발됐죠. 세조는 이들을 직접 국문(鞫問)했는데, 이들은 오히려 당당한 태도로 세조를 비난했다고 해요. 이 사건의 여파로 사육신을 비롯해 신숙주와 함께 집현전에서 활동했던 이들이 죽임을 당했어요. 이들의 죽음은 신숙주의 출세가도와 비교되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충신으로 부각됐어요. 신숙주는 배신자와 변절자로 기억되는 계기가 됐죠.
세조는 신숙주를 당 태종의 명신인 위징(魏徵)에 견줄 만큼 훌륭한 신하로 평가했어요. 신숙주는 ‘동국통감’ ‘국조오례의’ 등 각종 편찬 사업의 책임자로서 활약하며 조선 전기 문물 제도 정비에 크게 기여했어요. 조선왕조실록의 신숙주 졸기(卒記)에는 “인품이 고매하고 너그러우면서도 활달했다. 경사(經史)를 두루 알아 의논할 때 항상 대체를 파악했고, 대의를 결단할 때는 강물을 터놓은 듯 막힘이 없었다”라고 적혀 있어요. 실록의 졸기는 신하나 왕실 인물이 죽은 후 그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를 써놓은 거예요. 당시 사관은 신숙주에 대해 좋은 평가를 남긴 것이지요. 하지만 뛰어난 재능으로 국정 운영에 기여했다는 사실과 별개로 왕위 찬탈과 숙청이라는 정치적 변국 속에서 그가 택한 결정은 후대 사람들이 그를 다르게 평가하게 했습니다.
국제 감각도 겸비
신숙주는 폭넓은 해외 경험을 바탕으로 국제적인 지식과 감각을 겸비한 외교관이기도 했어요. 그는 당시 조선과 관계를 맺고 있던 명·일본·여진을 직접 방문하거나 접하면서 외교 활동에 필요한 종합적인 시각을 갖출 수 있었어요. 그는 1443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일본 교토를 다녀왔어요. 1460년에는 강원·함길도의 도체찰사로서 여진족을 정벌하는 공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이런 활동을 바탕으로 신숙주는 세조와 성종 초기까지 외교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어요.
특히 신숙주는 당대 인물 중에서 일본을 가장 깊게 이해하고 있던 인물이었어요. 그는 왕명으로 1471년 ‘해동제국기’를 편찬했어요. 이 책은 그가 일본에 다녀온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된 것으로, 일본의 정치·외교·사회·풍속·지리 등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일종의 외교 지침서였어요.
책 서문에는 신숙주가 생각한 대일 관계의 기본 방침이 나와 있어요. 그는 일본을 약속을 잘 어기며 이익을 탐하는, 무력이 강한 민족으로 인식했어요. 하지만 조선이 이들을 무력으로 대응하기보다 외교를 통해 화평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죠.
훗날 임진왜란을 겪은 유성룡은 ‘징비록’ 맨 앞에 신숙주와 관련된 이야기를 적었어요. 신숙주가 임종하기 직전 성종이 유언을 남길 것을 권하자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에 교린이 깨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답했다는 내용이었죠. 신숙주가 살았던 당시 일본의 국력은 중국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미약했지만, 안심하지 말고 언제나 일본을 관찰하고 관계를 이어가야 한다는 뜻이 담겼다는 분석이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