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리트 아트는 거리에 없다
김홍식 지음 l 출판사 모요사 l 가격 2만원
그라피티와 스트리트 아트의 역사와 변화를 탐구하고, 현재 스트리트 아트의 위치와 의미를 재조명하는 책이에요. 현대미술 작가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저자는 그라피티와 스트리트 아트 작품을 연구해 왔어요. 도시를 채색하는 일이 허락받지 않은 공공미술 같아서 재미있었다고 저자는 말해요. 그러나 아무 곳에나 흔적을 남기는 것은 지양했어요. 절묘한 위치에 그려야, 수묵화의 여백을 관장하는 ‘낙관’처럼 도시의 시선을 잡아당기는 힘이 생기기 때문이죠.
‘그라피티’란 도시 벽면 등에 스프레이로 그린 낙서 같은 문자나 그림이에요. 알파벳으로 자신의 이름이나 별명을 쓰고 다니는 행위에서 출발했죠. ‘스트리트 아트’는 야외 전시, 거리 퍼포먼스, 벽화 등 개방된 공간에서 예술가들이 행하는 활동을 뜻해요. 그라피티는 아무 데나 낙서하듯 그려 자기를 드러내고 싶어 하는 반면 스트리트 아트는 공간과 주변에 어우러지는 예술을 추구한다는 차이점이 있어요.
1980년대 이전에 그라피티는 뉴욕 청소년들의 문화로 생각됐지만, 장 미셸 바스키아와 키스 해링 같은 현대 미술가들이 등장하며 ‘그라피티 아트’로 격상됐어요. 그리고 1990년대는 그야말로 스트리트 컬처(거리 문화)의 부흥기였죠. 다만 스트리트 컬처는 제도권 미술관에 진입하지 못했기에, 스트리트 컬처의 모든 실험은 거리 등에서 만들어진 상품들을 통해 이뤄졌다고 해요. 전시와 작품 판매보다 언더그라운드 음악가의 앨범 표지 디자인처럼 필연적으로 복제가 수반되는 방식으로 발전했죠.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스트리트 컬처는 세계적으로 대중화됐어요. 그리고 ‘스트리트 아트’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져 차츰 쓰이기 시작했는데요. 스트리트 아트는 스트리트 컬처의 시각적인 측면을 담당하며 주류 문화에 진입했어요. 이때 뱅크시라는 아티스트가 나타나면서 드디어 스트리트 아트는 ‘미술사’에서도 정식으로 다뤄지게 됩니다.
그러나 제도권 미술계가 스트리트 아트를 받아들이면서 거리에서 발견되는 작품들이 현저히 줄어들기 시작해요. 스트리트 아트 특유의 야성과 활력, 허락받지 않은 즐거움이 사라진 것이죠. ‘스트리트 아트는 거리에 없다’라는 이 책의 제목은 이런 의미를 담고 있어요. 그리고 거리에서 출발했지만 더 이상 거리 문화의 정신을 담고 있지 않은 스트리트 아트는 이제 ‘어반 아트’로 진화했습니다. 어반 아트는 거리 기반이 아닌 갤러리와 상업 공간 중심의 스트리트 아트를 의미해요.
저자는 그라피티에서 출발해 어반 아트로 나아간 스트리트 아트를 ‘힙합’에 비유해 설명해요. “그라피티-스트리트 아트-어반 아트로 진행되는 진화의 화살이 그리는 궤적은 힙합이 브롱스라는 뉴욕의 한 지역에서 세계가 공유하는 문화로 발전한 양상과 매우 닮아 있다. 많은 래퍼들이 거리에서 출발했지만 지금은 그곳에 없는 것처럼 스트리트 아티스트들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