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내 체육관에 있는 수영장이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하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서울 용산구에 있는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 가면 실제로 커다란 수영장을 미술 작품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Spaces’(공간들)라는 제목으로 진행되는 마이클 엘름그린과 잉가 드라그셋의 작품 전시입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일상의 공간들을 미술 작품으로 만들어 전시합니다. 수영장 외에도 집이나 음식점과 같은 친숙한 공간과 미술가의 작업실도 보여주죠. 관객들은 가만히 서서 작품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직접 작품 속을 걸어 다니면서 구경하는 거예요. 미술 작품은 무대가 되고, 관람자는 무대 위의 주인공이 되는 거죠.
덴마크 출신의 엘름그린은 시인으로 활동했었고, 노르웨이의 드라그셋은 연극 배우로 활동했어요. 두 사람은 1995년부터 2인 팀을 결성한 후 지금까지 독일 베를린의 작업실에서 함께 작품을 만들고 있답니다. 두 미술가는 왜 우리에게 익숙한 장소들을 전시장에 설치해 놓았을지, 작품을 보면서 의미를 생각해 보기로 해요.
조각일까, 건축일까
엘름그린과 드라그셋은 조각을 건축과 결합하거나, 조각과 건축 사이 경계를 오가는 작품을 선보입니다. 조각과 건축은 손에 만질 수 있는 듯한 양감(量感)과 부피감이 있는 입체라는 점에서 비슷하죠. 건축과 조각을 구분하는 전통적인 기준은 바로 내부 공간에 있어요. 조각의 경우는 내부 공간이 크게 중요하지 않지만, 건축은 내부가 중요해요. 건물은 기본적으로 사람이 그 안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하거든요. 그러나 현대 조각과 현대 건축에서는 유리처럼 투명한 재료를 쓴다거나 안과 밖을 연결하는 디자인으로 내외부의 경계 구분이 모호해졌답니다. 건물 같은 조각도 있고, 조각품 같은 건축물도 볼 수 있지요.
<작품1>은 물이 없는 텅 빈 수영장인데요. 흰색 에폭시 소재로 만든 인물 조각상이 수영장 곳곳에 띄엄띄엄 놓여 있어요. 물이 없는 탓인지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 흰 조각상들 탓인지, 시간이 정지한 듯한 기분이 듭니다. 인물 조각상들은 모두 덩그러니 혼자 있어요. 각자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 있는 듯한 모습인데, 외로운 것 같기도 하고, 지루한 것처럼도 보이죠.
<작품2>는 집이에요. 모델하우스나 다른 사람의 집을 방문한 느낌이 드는 작품이죠. 관람자는 거실, 주방, 침실, 서재, 화장실까지 갖춘 140㎡(42평) 크기 집 안에서 이것저것 살펴보면서, 마치 명탐정이 된 듯 어떤 사람이 살고 있는지 하나씩 단서를 찾아보게 돼요. 집 안 거실 유리창엔 창문 밖을 보고 있는 소년의 조각상도 보이는데요, 이 소년도 혼자예요. 관람자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지만, 조각상은 누군가 자기를 쳐다보는 줄 전혀 모르는 것 같이 창 밖을 보고 있죠.
작품 속으로 들어가는 관람자
전통적으로 조각은 받침대 위에 올려져 있고, 그림은 액자 틀 안에 들어 있습니다. 받침대와 액자는 작품을 보호하기도 하지만, 또 한 가지 중요한 기능을 해요. 바로 작품을 일상의 공간에서 분리하는 경계의 역할이지요. 그런데 엘름그린과 드라그셋의 작품에는 받침대나 액자가 아예 없습니다.
<작품3>을 보세요. 레스토랑의 둥근 식탁에 홀로 앉은 여성이 영상 통화를 하는 모습이에요. 사람인 줄 착각할 정도로 실제 모습과 비슷한 그녀는 사실 실리콘으로 만들어진 조각상이죠. 그리고 그녀가 대화하는 전화 상대도 실제인물이 아닌 가상의 남성입니다. 관람자는 식탁 옆으로 지나가면서 한국어로 자기 사연을 구구절절 이야기하는 한 남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요. 그러곤 자기도 모르게 여자의 휴대전화 속 영상을 들여다보게 되죠. 작품 속에서 벌어지는 대화 상황에 관람자도 ‘훔쳐보는 낯선 사람’ 혹은 ‘관심 없이 지나가는 사람’ 등으로 직접 참여하는 셈이죠. 이 작품은 우리가 전시장 안을 걸어 다니는 것과 작품 속 공간에 침범한다는 것 사이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아요. 관람자는 자연스럽게 무대의 배우로 초대받는 겁니다.
<작품4>는 흰 벽으로 둘러싸인 미술가의 작업실 공간입니다. 미술가로 보이는 흰 조각상이 흰색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이곳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관람객은 그림 속의 인물이 되어버립니다. 캔버스가 거울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에요. 거울에 관람자의 모습이 반사되어 비치는 순간, 우리도 그림 속에 등장하게 되는 거죠. 작품과 관람객 사이의 경계가 다시 한번 사라지게 되는 거예요.
엘름그린과 드라그셋의 작품은 조각과 건축, 현실과 허구, 일상과 미술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작업을 시도했어요. 그러나 경계가 사라진 작품을 보면서 관람자는 오히려 경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기도 해요. 미술 작품은 경계가 흐려졌지만, 우리는 여전히 미술은 뭔가 특별해야 한다고 믿고 있고, 늘 보던 것과는 조금은 색다르기를 기대하고 있거든요. 엘름그린과 드라그셋의 작품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은 아마 그런 이유에서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