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임윤찬이 지난 2일 영국 런던에서 열린 ‘그래머폰 클래식 뮤직 어워즈’에서 2관왕에 오른 뒤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 /그래머폰

피아니스트 임윤찬(20)이 지난 2일 세계적 음반 시상식인 ‘그래머폰 뮤직 어워즈’ 2관왕에 올랐습니다. 그는 영국 런던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쇼팽의 ‘연습곡’ 음반으로 피아노 음반 부문과 ‘올해의 젊은 예술가’ 부문을 수상했지요. 그래머폰 측은 선정 사유에서 “경력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이미 세계적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연주자들이 있다. 콩쿠르 우승자인 임윤찬 역시 최종 후보에 이를 때까지 놀라운 위업을 이뤘다”고 격찬했습니다. 지난 2022년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18세의 나이로 역대 최연소 우승을 거둔 뒤 단 2년 만에 세계 굴지의 음반상을 거머쥔 것입니다.

이 시상식은 영국 클래식 음반 전문지 그래머폰이 1977년부터 해마다 개최하고 있지요. 영국 일간 더타임스는 이 상을 ‘클래식 음악의 오스카상’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한국 음악가 중에서는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가 1990년 실내악 부문과 1994년 협주곡 부문, 첼리스트 장한나가 2003년 협주곡 부문에서 수상했습니다. 피아노 음반 부문에서 한국 음악가가 수상한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올해의 젊은 예술가’ 부문은 1993년 한국계 바이올리니스트 사라 장(장영주)에 이어 두 번째입니다. 이 음반상이 그토록 화제를 모으는 이유는 뭘까요.

1차 대전 이후 클래식 음반 산업도 발전

이 음반상의 권위를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이 상을 주최하는 그래머폰의 역사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머폰(Gramophone)은 전축이나 축음기라는 뜻의 일반명사인 동시에 이 잡지를 의미하는 고유명사이기도 합니다. 1923년 창간됐으니 지난해 100주년을 맞았지요. 이 잡지가 창간된 1920년대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미국과 유럽에서 재즈와 영화 등 대중문화가 만개했던 시기입니다. 당시 문화 산업을 이끈 신기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음반이었지요. 독일 음악 평론가 헤르베르트 하프너가 ‘음반의 역사’에서 썼듯이 “쓰라린 전쟁을 경험한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을 즐기며 살기를 원했고, 그래서 축음기가 오락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1920년대 초반 미국의 음반 판매량이 1억5000만장에 이르렀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그래머폰이 지난해 창간 100주년을 맞아 발간한 특별판 표지. /그래머폰

클래식 음반 역시 특수(特需)를 누렸고 스타 지휘자와 연주자들이 쏟아져 나왔지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를 무려 26년간 이끌었던 지휘자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1882~1977), 베를린 필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1886~1954) 등이 본격적으로 음반 녹음을 시작한 것도 이 무렵입니다. 음반이 등장하기 전까지 음악은 한번 연주되고 나면 사라지는 ‘일회성’의 예술이었지요. 하지만 음을 고정시키는 음반이 등장하면서 서로 다른 시대와 국적의 연주자들을 비교하는 일이 가능해졌습니다. 영국 음악 평론가 노먼 레브레히트는 “오래지 않아 거실에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음반을 하나만 구비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은 시대가 왔다. 다른 두세 종의 연주를 갖추어 놓고 지적인 깊이와 교양의 폭을 자랑했다”고 했습니다.

100년간 클래식 ‘길잡이’ 역할

창간 초기부터 그래머폰이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음반에 대한 평인 ‘리뷰(review)’ 중심의 잡지를 표방했다는 점입니다. 지금도 매달 100여 종의 음반·영상·음악 서적에 대한 리뷰를 싣고 있지요. 지난 100년간 클래식 음반의 길잡이 역할을 했던 잡지가 그래머폰인 셈입니다. 참고로 미국 대중음악 전문지인 빌보드가 인기 음악 차트(순위표)를 발표하기 시작한 건 1936년입니다. 대중의 인기로 먹고사는 팝 음악에서 중요한 것이 ‘차트’라면, 클래식 음악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건 평단과 애호가들의 ‘리뷰’라는 생각이 들지요.

그래머폰 창립자이자 편집장이었던 콤프턴 매켄지는 소설·희곡·전기 등을 펴낸 작가였어요. /위키피디아

그래머폰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창립자이자 초대 편집장이었던 콤프턴 매켄지(1883~1972)입니다. 소설만 40여 편, 희곡 2편, 역사서와 전기 30여 권 등을 펴낸 작가였지요. 1차 대전 당시에는 영국군 첩보 부대 소속으로 그리스에 투입된 뒤 현지 정치 상황에 깊숙이 관여하는 ‘스파이 활동’도 했습니다. 그래머폰을 창간한 후 무려 38년간 편집장을 맡아서 직접 글을 썼지요. 매켄지의 예전 글을 찾아본 적이 있습니다. “1921년 나는 당시 64세의 작곡가 에드워드 엘가를 처음 만났다”는 구절로 시작하는 글이 무척 고색창연했지요.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으로 음반 산업도 불황을 겪었지만, 전후 1950년대부터 다시 호황 국면에 접어들었습니다. 특히 음악 수록 시간이 대폭 늘어난 LP(Long Playing) 음반과 입체적 소리를 담을 수 있는 스테레오의 도입도 음반 산업의 발전에 톡톡히 기여했지요.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1908~1989)과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음반사 도이치그라모폰(DG)이 클래식 음악의 상징으로 부상한 것도 이 무렵입니다. 음반 산업의 전성기였던 20세기 후반, 그래머폰은 “메이저 음반사의 이익과 손실을 결정할 만큼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노먼 레브레히트)고 합니다.

해마다 ‘올해의 예술가’ 시상

그래머폰이 리뷰한 음반들을 해마다 한 번씩 결산하는 시상식이 ‘그래머폰 어워즈’입니다. 음반상이기 때문에 시상 분야 역시 관현악·협주곡·합창·실내악·기악 독주 같은 장르나 현대음악·고음악 같은 시기로 구분됩니다. 그러다가 1990년대부터는 ‘올해의 예술가’와 ‘올해의 젊은 예술가’ ‘평생 공로상’ 등 개인이나 단체에 대한 시상도 추가됐지요. ‘올해의 예술가’ 부문이 남녀 주연상이라면 ‘올해의 젊은 예술가’는 신인상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러시아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막심 벤게로프(50)는 1994년 ‘올해의 젊은 예술가’ 부문을 수상한 뒤 2002년 ‘올해의 예술가’에 선정됐지요. 마찬가지로 지휘자 바실리 페트렌코(48) 역시 2007년 ‘올해의 젊은 예술가’에 선정된 뒤 2017년 ‘올해의 예술가’에 뽑혔습니다. 앞으로 한국 젊은 연주자들 역시 그런 거장으로 성장하기를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