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화가 존 밴덜린이 1847년 그린 그림으로, 1492년 10월 12일 오늘날 바하마 제도의 한 섬에 상륙한 콜럼버스와 선원들을 묘사했어요. 그는 이곳에 산살바도르라는 이름을 붙여요. 스페인어로 ‘성스러운 구세주’라는 뜻이랍니다. /위키피디아

지난 14일은 이탈리아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1492년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것을 기념하는 ‘콜럼버스의 날’이었어요. 미국에서 오랜 기간 주(州)별 기념일로 삼다가 400주년인 1892년 한 차례 국가 기념일로 선포됐고, 1971년 연방 공휴일이 되어 이후 매년 10월 둘째 월요일을 콜럼버스의 날로 기념하고 있답니다.

그런데 미국 시민 단체와 학계 일부에선 콜럼버스를 기리는 것이 서구의 아메리카 대륙 식민지화와 원주민 착취를 정당화한다고 비판하고 있어요. 그래서 콜럼버스의 날을 ‘원주민의 날’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도 있답니다. 이런 여론을 반영해 일부 주에선 콜럼버스의 날과 원주민의 날을 같이 기념하기도 해요. 2021년에는 조 바이든 대통령이 콜럼버스의 날에 원주민의 날을 기념하는 선언을 발표했답니다.

오늘은 콜럼버스가 어떻게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게 됐는지, 그 이후 세계사의 흐름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알아볼게요.

지난 14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콜럼버스의 날’ 퍼레이드에 중세 유럽 복장을 한 참가자가 행진하고 있어요. 공휴일인 이날엔 미국 곳곳에서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상륙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립니다. /로이터 뉴스1

인도 가기 위해 대서양 가로질렀죠

콜럼버스는 어떻게 유럽에서 아메리카 대륙까지 가게 된 걸까요? 15세기 유럽에선 인도에서 나는 향신료가 인기 많은 기호품이었어요. 유럽인들은 이 향신료를 더 갖고 싶어했지만, 인도로 가는 길은 매우 험난했죠. 육로로는 수천㎞를 가야 했고, 아프리카 대륙의 해안을 따라 항해하는 방법도 쉽지 않았죠.

그러던 중 콜럼버스는 대서양을 가로질러 보겠다는 새로운 발상을 하게 됩니다. 어렸을 때부터 배를 탔던 그는 각종 지도들을 연구하며 ‘지구는 둥글다’는 사실을 믿고 있었어요. 세상이 둥글다면, 서쪽으로 갔을 때 언젠가 인도의 동쪽 해안에 다다를 수 있다고 생각한 거죠.

그러나 지구를 가로지르는 항해에는 엄청난 돈이 필요했어요. 배를 사고, 선원을 고용하고, 막대한 양의 음식과 물도 준비해야 했거든요. 콜럼버스는 처음엔 포르투갈 국왕을 찾아갔어요. 그러나 막 아프리카 항로를 개척한 포르투갈에 콜럼버스의 제안은 매력적이지 않았어요. 이에 콜럼버스는 포르투갈과 경쟁 관계에 있었던 에스파냐를 찾아가지만, 에스파냐는 당시 이슬람교도들과 전쟁을 치르느라 정신이 없었죠. 영국, 프랑스도 콜럼버스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콜럼버스는 1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끝에 후원자를 찾을 수 있었어요. 1492년 이슬람 세력과 전쟁을 마무리한 에스파냐가 신항로 개척에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콜럼버스를 지원하기로 한 것입니다.

콜럼버스의 항해 경로를 그린 지도예요. 콜럼버스는 총 4차례에 걸쳐 아메리카 대륙으로 항해를 떠납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인도로 가는 항로를 발견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픽=백형선

새로 도착한 땅엔 향신료 없었죠

1492년 8월 3일. 마침내 콜럼버스는 배 세 척을 띄우고 선원 90여 명과 함께 항해를 시작했어요. 하지만 기대와는 다르게 한 달이 넘도록 육지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선원들은 오랜 시간 신선한 과일과 채소를 먹지 못해 점차 건강이 나빠졌어요. 불만을 가진 선원들은 콜럼버스를 바다에 던져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모의까지 합니다. 이를 알아챈 콜럼버스는 “마지막으로 사흘 동안만 더 나가보고 그래도 육지가 나타나지 않으면 뱃머리를 돌리겠다”고 선원들에게 약속했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콜럼버스는 1492년 10월 12일 오늘날 미국 플로리다 인근 카리브해에 있는 바하마제도에 도착했어요. 그리고 이를 에스파냐 땅이라 선언하고 ‘성스러운 구세주’라는 뜻의 산살바도르라는 이름을 붙이죠. 그는 자신이 인도 연안의 섬에 도착했다고 확신했답니다. 갈색 피부에 새카만 머리카락을 가진 주민들을 만나자 그들을 인도 사람이라는 뜻으로 ‘인디언’이라고까지 불렀고요.

콜럼버스가 첫 항해에서 약간의 금과 원주민을 데리고 돌아오자, 에스파냐는 떠들썩했어요. 콜럼버스가 인도라고 생각한 ‘신대륙’에 많은 금이 매장되어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고, 2차 항해에는 더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습니다. 선원만 1000명 이상이었고, 배도 17척이나 띄웠죠. 다시 카리브해 섬들에 도착한 콜럼버스는 원주민까지 동원했지만 생각보다 금은 많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후추 같은 향신료도 보이지 않았죠.

생각만큼 수확이 없자, 콜럼버스는 원주민을 포로로 잡아 노예로 팔기 시작했습니다. 수백명의 원주민이 노예가 되어 유럽에서 경매에 부쳐지기도 했어요. 이들은 강제로 노동을 하거나, 귀족들에게 선물로 제공됐죠. 또 콜럼버스는 아메리카에서의 식민지 건설을 위해 많은 원주민을 착취하며 농작물을 재배하게 하고, 재산도 빼앗았습니다.

지난 2020년 미국 보스턴에서 열린 ‘원주민의 날’ 행사에서 전통 복장을 한 참가자가 손을 번쩍 들어 올린 채 행진하고 있어요. 최근 미국 사회에선 ‘콜럼버스의 날’을 ‘원주민의 날’로 바꿔야 한다는 요구가 나와요. /게티이미지코리아

탐험 이후 식민지 확장 본격 시작

콜럼버스의 목표 달성은 실패했지만, 그의 항해는 인도로 가는 서방 항로 탐험을 크게 자극하였고 이후 많은 유럽인이 모험을 떠났어요. 유럽의 식민지 확장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죠. 유럽인들은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을 죽이고 노예로 끌고 갔어요. 특히 천연두나 홍역 등 유럽인들이 옮겨온 질병에 원주민들은 속수무책이었어요. 예컨대, 당시 아이티에선 새로 유입된 질병으로 한 세기 만에 전체 인구 약 25만명 중 90% 이상이 사라졌답니다.

또 유럽 국가들이 아프리카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노예무역’이 이때부터 확산됐다는 평가가 나와요. 포르투갈,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유럽 국가들은 19세기까지 대서양 노예무역에 참여하며 1000만명 이상의 아프리카 주민을 노예로 만들어 아메리카 대륙으로 보냈죠. 당시 유럽인들은 아메리카에서 사탕수수, 담배, 커피 등을 재배하는 대규모 플랜테이션을 운영했는데, 여기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이에요. 콜럼버스의 탐험으로 많은 원주민이 고통받게 된 것이죠. 이것이 ‘콜럼버스의 날’을 ‘원주민의 날’로 기려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