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화가 정선이 그린 ‘압구정도’예요. 가운데 소나무가 있는 언덕 위에 높이 세워진 것이 압구정입니다. 당시 압구정에 올라서면 한양(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위키피디아

최근 서울 강남구 압구정 상권이 젊은 세대로 다시 붐비고 있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어요. 1988년 한국 맥도날드 1호점이 압구정에 들어선 뒤로, 압구정 로데오거리는 한국의 ‘유행 1번지’로 통했지요. 압구정은 이후 다른 신흥 상권에 밀려 침체를 겪다가, 최근 유명 맛집들과 패션 브랜드 매장들이 다시 들어오며 인기를 회복했어요. 그런데 압구정이란 이름은 조선 시대 때부터 있었다는 사실, 알고 있었나요? 오늘은 이름만큼 독특한 역사를 갖고 있는 압구정에 대해 알아볼게요.

압구정을 건립한 한명회

압구정(狎鷗亭)은 조선 초기 최고 권력자였던 한명회(1415~1487)가 1476년에 세운 정자였어요. 한명회는 자신의 호(號)인 ‘압구’를 따 정자 이름을 압구정이라고 했답니다. 친할 압(狎) 자에 갈매기 구(鷗) 자를 써서 ‘갈매기를 벗 삼는다’는 뜻이에요. 노년에는 정치를 잊고 유유자적하며 한강 변에서 시간을 보내고자 지은 정자였답니다.

한명회가 당대 최고의 권력을 누릴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요? 한명회는 과거 시험에 여러 번 응시했지만 번번이 낙방하면서 40세 가까이 되도록 한가한 삶을 보냈다고 해요. 38세가 되던 해 개성에 있는 경덕궁의 문지기로 드디어 관직에 나가게 되었어요. 궁궐 문지기라는 아주 낮은 벼슬을 맡았지만, 이때 한명회는 자신의 인생을 한 번에 역전시켜 줄 중요한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수양대군이었습니다.

충남 천안시에 있는 한명회 신도비(神道碑). 신도비는 왕이나 고위 관료의 공적을 기록한 비석이에요. 한명회가 사망하고 난 다음 해(1488년)에 세워졌습니다. /국가유산청

한명회는 세상의 혼란을 다스리려면 강력한 군주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조선의 임금은 10대에 왕위에 오른 단종이었어요. 수양대군의 조카이기도 했죠. 수양대군은 단종이 어리다는 점을 이용해 반대파를 제거하고 자신이 권력을 잡을 계획을 꾸며요. 이 과정에서 한명회가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수양대군은 한명회의 말에 따라 거사를 준비했고, 결국 계유정난을 일으켜 권력을 잡는 데 성공했어요. 한명회는 계유정난 이후 1등 공신에 책봉되죠. 한명회는 수양대군이 왕(세조)으로 즉위한 후에도 총애를 받으며 최고 관직인 영의정까지 오르게 됩니다.

또한 한명회는 자신의 딸들을 각각 세조의 아들과 손자인 예종과 성종에게 시집보내죠. 왕실과 사돈 관계를 맺으며 한명회는 조선의 핵심 권력자가 됩니다. 성종 시기에는 왕의 장인이자, 국가의 원로 대신으로서 정계를 주름잡아요.

압구정, 권력과 부를 상징하다

한명회가 건립한 압구정은 한강 변에 있어 경치가 아주 빼어났다고 해요. 압구정의 전망이 좋다는 소문이 중국 명나라까지 나서, 조선에 온 중국 사신들이면 누구나 압구정에서 연회를 베풀어주길 바랄 정도였다고 합니다.

한명회는 갈매기 무리를 보려고 압구정을 짓는다고 이야기했지만, 오히려 압구정은 한명회의 부와 사치를 상징하는 공간이 된 거죠. 한명회를 만나려고 뇌물을 들고 기다리는 사람이 정말 많았고, 또 한명회의 힘을 얻어 벼슬길에 오른 사람도 많았답니다. 세간에서는 압구정에 정작 갈매기는 한 마리도 온 적이 없다는 말이 떠돌았어요. 그래서 백성들은 ‘친할 압(狎)’ 자를 ‘누를 압(押)’ 자로 바꾸어 압구정이 ‘갈매기를 억누르는 곳’이라고 했어요.

1978년 서울 강남 압구정 현대아파트 앞에서 한 주민이 밭을 갈고 있어요. 압구정 일대는 1960년대까지 논밭이었는데, 1970년대 강남 개발이 본격화되며 우리나라의 대표 부촌이 됐어요. /서울시역사아카이브

압구정은 한명회가 정치에서 물러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1481년 여름 조선을 찾은 중국 명나라 사신이 압구정을 구경하고 싶다고 했어요. 한명회는 공간이 좁다는 이유로 사신의 방문을 거절했지만, 계속되는 요구에 어쩔 수 없이 허락했어요. 그러면서 성종에게 ‘압구정은 본래 좁고, 지금은 날씨가 매우 덥기 때문에 잔치를 차리기 어려우니, 담당 부서를 시켜 정자 옆 평평한 곳에 큰 천막을 치게 해달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국왕이 사용하는 천막을 사용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신하가 국왕의 물건을 쓰겠다고 한 것이 성종은 매우 언짢았어요. 그래서 성종은 압구정이 아닌, 왕실 소유 정자인 제천정(濟川亭)에서 잔치를 치르게 했어요.

그런데 한명회는 나중에 중국 사신들을 따로 초대해 잔치를 열었어요. 이 사건 이후 한명회는 신하들에게 무례하다는 비판을 받으며 탄핵 대상이 됐어요. 성종의 노여움을 산 한명회는 얼마 안 가 모든 관직을 빼앗기고 권력에서 물러납니다. 그가 지은 압구정에서 여생을 보내다 1487년에 세상을 떠나요.

‘압구정동’ 명칭으로 되살아났죠

압구정은 한명회의 파란만장한 정치 인생과 권력의 무상함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공간이라 할 수 있어요. 그래서 다음과 같은 한시가 지금까지도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임금을 폐하고 하늘을 부순 칠삭둥이, 갈매기 벗하고 친구가 넷인데 부귀를 얻었는가. 백년도 못 살면서 더러운 이름은 천년을 가니, 상당부원군 한씨 대머리라네.” 여기서 임금은 단종, 칠삭둥이는 한명회, 상당부원군은 한명회가 받은 조선 시대 작위를 뜻한답니다.

압구정 현대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압구정지’ 표지석이에요. 압구정은 조선 말기에 철거됐고, 현재는 위치를 알리는 표석만 남아 있답니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명회가 사망한 후 압구정의 주인은 여러 번 바뀌었고, 마지막 주인은 철종의 사위이자 개화 지식인이었던 박영효였어요. 그가 갑신정변 당시 역적으로 몰리면서 모든 재산이 몰수되자, 압구정도 함께 몰수됐어요. 학계에선 고종 말기쯤 압구정이 헐렸다고 추측하고 있답니다. 사라진 압구정은 시간이 흘러 ‘압구정동’이라는 행정구역 명칭으로 되살아났고, 지금은 한 아파트 단지 안에 표지석만이 남아 그곳이 압구정 터임을 밝히고 있어요. 지금은 문화의 중심지가 된 압구정을 언젠가 방문한다면, 이곳의 역사적 의미를 떠올려 보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