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서울 경희궁에서 열린 과거제 재현 행사에서 참가자들이 답안을 작성하고 있어요. /김지호 기자

오늘은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을 치르는 날입니다. 열심히 공부해 온 수험생들이 긴장하지 말고 차분히 시험을 봐야 하는 날이죠. 그런데 옛날 수험 생활은 어땠을까요? 요즘처럼 심한 입시 경쟁을 겪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도 들겠죠. 결론부터 말하자면, 천만의 말씀입니다.

무척 복잡했던 관리 등용 과정

조선시대 대표적인 시험은 역시 과거(科擧)였죠. 서기 587년 중국 수나라 때 처음으로 시행됐던 과거 제도는 능력 있는 사람을 뽑아 관리로 등용하는 제도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초인 958년(광종 9년) 처음으로 실시했어요.

그런데 과거 시험은 대단히 복잡했습니다. 조선 시대엔 예비시험인 조흘강(照訖講)을 통과해야 응시 자격이 주어졌고, 이어 초시(初試)와 복시(覆試)를 봐야 했습니다. 복시는 유교의 기본 경전들인 ‘사서오경(四書五經)’ 시험을 보는 생원시(生員試)와 글을 잘 쓰는지 보는 진사시(進士試)로 나뉘었는데요. 생원시에 합격한 사람을 ‘생원’, 진사시에 합격한 사람을 ‘진사’라고 했습니다.

조선의 화원 한시각이 그린 ‘길주과시도’(왼쪽)와 ‘함흥방방도’(오른쪽)예요. 1664년 함경도 길주에서 과거 시험이 치러지는 장면과 함흥 관아에서 시험 합격자를 발표하는 모습을 각각 그린 거예요. /국립중앙박물관

생원과 진사에게는 성균관에 입학해 공부할 자격이 주어졌습니다. 여기서 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은 보통 1년 안에 문과(文科)에 응시할 수 있었죠. 문과는 국정을 운영하는 문관을 뽑는 시험입니다. 조선 중기 이후엔 성균관을 거치지 않고도 문과를 치를 수 있었지만 불리했습니다. ‘과거의 꽃’이라 불린 문과 시험은 3년마다 정기적으로 치러지는 시험인 식년시(式年試)에 주로 치러졌습니다. 무관을 뽑는 무과(武科)와 전문 기술관을 선발하는 잡과(雜科)도 이때 같이 치러졌죠.

응시 자격은 어땠을까요. 조선 법전인 ‘경국대전’에는 양인(良人)은 과거를 볼 수 있다고 쓰여 있습니다. 양인이란 천민을 제외한 양반·중인·상민을 뜻합니다. 고(故)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는 조선의 과거가 일종의 ‘출세의 사다리’였다며 평민(양반·천민을 제외한 계층)출신의 문과 급제자(합격자)가 전체의 24%에 이른다고 분석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점은, 양반이든 아니든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과거를 보기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수십년은 기본’이었다는 과거 준비

과거 시험은 벼슬길에 올라 명예와 재산을 얻을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양반 출신이라고 해도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반쪽짜리 양반’이 될 뿐이었죠. 먹고살 길도 막막해졌습니다. 많은 재산을 보유했던 ‘경주 최 부잣집’ 정도는 돼야 ‘과거는 진사 이상 보지 말라’를 가훈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겁니다. 그게 아니라면 출세를 노리는 사람들은 모두 비장한 각오로 과거 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고, 치열한 경쟁에 나섰습니다. 대략 열 살 때부터 최소 10년은 내다보고 과거를 준비했습니다.(이한 ‘조선, 시험지옥에 빠지다’)

그때도 ‘장수생’ ‘N수생’이 많았느냐고요? 20~30년 안에만 급제해도 ‘인재’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고종 때 선비 박문규는 83세, 철종 때 김재봉은 90세에 문과에 급제했습니다. 이들은 그때까지 평생 시험 공부를 한 것이죠. 이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과거에 급제하기 위해 수십년 동안 생업에 종사하는 대신 입시 공부를 하게 된다면 가정의 생계는 어떻게 될까요?

조선 시대 문과 시험 장원자의 답안을 모아 엮은 ‘동국장원책문 을집’. /국가유산청

이 때문에 과거 공부는 패가망신으로 통하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수험 생활 동안 책값, 교육비, 한양(서울)까지 오가는 교통비와 체재비가 끝없이 들어갔으니 말입니다. 초시는 지방에서도 치러졌지만 복시부터는 한양으로 가서 응시해야 했는데 한양 가는 길은 고달팠습니다. 남부 지방에서 서울까지 올라가려면 열흘 넘게 걸어가야 했거든요. 산적이나 소매치기에게 노잣돈을 도둑맞거나, 배를 타고 올라가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입시생은 궁핍하기 일쑤였는데, 대학자인 다산 정약용조차 과거 준비를 하면서 먹을 게 없어 굶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시험을 위한 학습량은 요즘보다 적지 않았을까요? 글쎄요. 사서오경(논어·맹자·중용·대학과 시경·서경·주역·예기·춘추)은 물론이고 294권에 달하는 ‘자치통감’, 130권 분량 ‘사기’를 비롯해 1000권이 넘는 책을 말 그대로 백 번 천 번 읽어서 달달 외워야 했답니다. 암기만 해서 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논술과 서예 능력, 정치적 식견과 시사 감각도 갖춰야 했어요.

대형 학원, 입주 과외도 있었어요

그래도 ‘지금 같은 사교육은 없었을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죠. 그것도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인조 때는 ‘암기 위주 학원’이 평안도에 등장해 지역 합격자를 늘렸고, 정조 때는 성균관 근처에 100명 넘는 수강생을 모은 ‘대형 입시 학원’이 있었다고 합니다. ‘입주 과외 선생’이라 할 수 있는 숙사(塾師)도 있었고, ‘기출 모범 답안지’(동책정수)와 ‘요점 정리 참고서’(초집), 시험 직전 예상 문제만 짚어 주는 ‘족집게 과외’도 존재했답니다.

조선 시대 부모들이라고 해서 요즘 부모들보다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덜 하지도 않았습니다. “왜 마음을 단단히 먹고 과거 준비를 하지 않는 것이냐”며 자식과 손자를 닦달한 사람이 조선 최고의 학자인 퇴계 이황이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받은 과거 합격증 ‘홍패’예요. 무과 병과 4등(전체 12등)으로 급제했다고 적혀 있어요. /국가유산청

숱한 낙방생이 생겨난 건 말할 것도 없지만, 가장 안타까운 응시생은 과거 준비를 열심히 해서 1894년 무렵에 어느 정도 실력을 갖췄던 사람들일 겁니다. 그해 일어난 갑오개혁으로 과거 시험 제도가 하루아침에 폐지되고 말았기 때문이죠. 이 해 5월 치러진 마지막 과거에서 급제한 사람이 훗날 헤이그 특사 중 한 명으로 활동한 이상설이었습니다. 반면 이 무렵 과거에 낙방했다가 시험이 사라져 영영 재응시 기회를 상실한 사람 중에는 이승만과 김구도 있었습니다.

과거 시험 1등인 장원으로 급제한 사람은 아주 큰 영예를 누렸지만, 과연 1등만이 꼭 역사에 남았던 것일까요. 여러분은 ‘윤기’와 ‘문명신’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 있나요? 1576년(선조 9년)의 과거에서 각각 문과와 무과 장원을 한 사람들이지만 아마 거의 모를 겁니다. 반면 이해 무과에서 12등을 한 인물은 모를 수가 없을 거예요. 그는 바로 이순신이었습니다. 어느 시험이든 사람을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은 될 수 없다는 교훈을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