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재계 서열 6위까지 올랐던 쌍용그룹의 전성기를 이끌던 김석원(78) 전 쌍용그룹 회장이 26일 새벽 3시 별세했다.
1945년 대구에서 태어난 김 전 회장은 서울고 졸업 후 1966년 미국 브랜다이스대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유학 중이던 1970년 귀국해 해병대에 자원 입대했고, 베트남전에도 10개월간 참전했다.
쌍용그룹의 모체는 1939년 김 전 회장의 부친인 김성곤 창업주가 설립한 대구 소재 비누공장 ‘삼공유지합자회사’였다. 1962년 시멘트 제조기업 쌍용양회(현 쌍용C&E)를 인수하며 ‘쌍용’이라는 사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975년 김 창업주가 타계하자 당시 30세였던 김 전 회장이 그룹 회장으로 취임했다.
젊은 나이에 경영 일선에 나선 김 전 회장은 공격적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하며 사세(社勢)를 키웠다. 쌍용중공업(현 STX)과 쌍용종합건설(현 쌍용건설)을 세웠고, 1983년에는 효성그룹으로부터 효성증권을 인수하기도 했다.
미국 유학 시절 레이싱 학교를 수료할 정도로 자동차에 관심이 많았던 김 전 회장은 1986년 동아자동차(쌍용차·현 KG모빌리티)를 인수하고 1988년 쌍용자동차로 사명을 바꿨다. 당시 김 전 회장은 삼성보다 높은 인수 금액을 써낼 정도로 의지가 강했다. 동아자동차는 버스를 주로 생산하던 기업이었는데, 김 전 회장은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승용차 사업에 투자했다. 그 결과, 쌍용자동차는 ‘코란도 훼미리’와 ‘무쏘’를 앞세워 국내 스포츠유틸리티차(SUV) 시장에서 독보적인 인기를 누렸다. 쌍용자동차의 성장에 힘입어 쌍용그룹은 한때 재계 서열 6위까지 올랐고, 김 전 회장은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 삼미그룹 김현철 회장과 함께 ‘재계의 3김(金)’으로 불리기도 했다.
김 전 회장은 잠시 정계에도 몸담았다. 1996년 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구 달성군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하지만 쌍용그룹이 자동차 사업 확대로 인한 자금난에 국제통화기금(IMF) 외환 위기까지 맞물리자, 김 전 회장은 1998년 2월 의원직을 사퇴했다. 김 전 회장이 경영에 복귀 후 쌍용그룹은 자동차를 비롯해 주요 계열사를 매각하며 회생을 도모했지만 결국 정상화되지 못하고 해체 수순을 밟았다.
김 전 회장은 동계스포츠 불모지였던 한국이 동계올림픽 개최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초석을 다진 인물이기도 하다. ‘리프트’라는 개념조차 생소하던 1974년 용평스키장을 만들고 리조트를 개발했다. 2011년 본지 인터뷰에서 그는 용평스키장 개발 이유에 대해 “우리도 산이 있고 겨울이 있고 눈이 있는데 왜 (미국처럼) 안 되느냐. 내가 한번 만들어보자는 오기가 생겼다”고 했다.
김 전 회장은 1982년 한국스카우트연맹 총재로 선출돼 스카우트 운동에 헌신했으며, 1991년 강원 고성에서 개최된 세계스카우트잼버리 대회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2000년부터 3년간은 세계스카우트지원재단(WSF) 의장직을 맡아 한국스카우트 위상 제고에도 힘썼다.
김 전 회장의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러진다. 유족으로는 부인 박문순씨, 아들 김지용(학교법인 국민학원 이사장), 김지명(JJ푸드 시스템 대표), 김지태(태아산업㈜ 부사장)씨가 있다. 빈소는 신촌 세브란스병원, 발인은 29일 오전 7시 20분. 장지는 강원도 용평에 마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