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정문술 전 미래산업 회장은 본지 인터뷰 때 “모든 재산을 우리나라의 기술 발전을 위해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그 약속을 지켰다. /KAIST

벤처 1세대로 기업가의 사회 환원을 확산한 정문술(86) 전 KAIST 이사장이 12일 오후 9시 30분 숙환으로 별세했다. 국내 최초로 미국 나스닥에 상장 기록을 세우며 국내 벤처 산업의 토대를 마련했으나, 자녀들에게는 아무런 유산을 남기지 않고 학교에 기부했다. “기술이 한국을 먹여 살리는 것”이라며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 기부한 것이 총 515억원에 이른다.

고인은 본인의 기부가 외부에 알려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기부의 진전성이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2003년 10월 30일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열린 ‘정문술 빌딩’ 준공식에 박호군 당시 과학기술부 장관과 홍창선 KAIST 총장, 대덕연구단지 각급 기관장 등이 모였다. 이 건물은 정문술 전 미래산업 회장이 IT(정보기술)와 BT(바이오 기술) 간 융합기술 분야 고급 인력을 양성해 달라며 KAIST에 기부한 300억원 가운데 110억원을 들여 신축한 건물이다. 그런데 주인공 격인 정 전 회장은 준공식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학교 측이 축사를 부탁했고 감사패를 증정하겠다고 했지만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며 아예 불참한 것이다. 이날 준공식 도중 홍 총장이 “정 전 회장이 휴대전화도 받지 않고 잠적해 버렸다”고 설명하자 행사장이 숙연해졌다.

2014년 정 전 회장은 KAIST에 현금 100억원과 115억원 상당 부동산 등 총 215억원을 추가로 기부한다고 밝힌 후 본지에 보낸 편지에서 “‘부(富)를 대물림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하루에도 12번씩 마음이 변했다”며 “이번 기부는 개인적으로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였으며,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는 소중한 기회였다”고 했다.

◇국내 최초 나스닥 상장한 ‘벤처 1세대’

정 전 이사장은 1962년 박정희 정부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에 특채돼 기조실 기획조정과장까지 올랐으나, 1980년 들어선 신군부의 보안사 압력에 해직됐다. 퇴직금 2000만원을 들여 인수한 공장이 사실은 빚덩이였고, 이후 설립한 금형업체도 대기업의 견제로 1년을 버티지 못했다. 그의 ‘창업 신화’는 1983년 반도체 장비 제조업체인 미래산업을 창업하면서 시작됐다. 중앙정보부 재직 때 일본 출장에서 접한 도시바의 단파 라디오에 적힌 ‘IC’라는 글자를 보고 관심을 갖게 된 반도체 관련 회사를 세운 것이다. 은퇴한 일본인 엔지니어를 영입해 반도체 검사 장비를 국산화한 미래산업은 국산 반도체 수출 호조에 고속 성장을 거듭했다. 반도체 장비 ‘메모리 테스트 핸들러’로 유명해졌고 국제통화기금(IMF) 외환 위기 때에는 연구개발비를 과감하게 투자해 1999년 선진국이 독점하던 전자제품 제조 기초 장비인 ‘SMD 마운터’ 개발에 성공했다. 같은 해 국내 기업 최초로 미국 나스닥에 상장했다. 그는 1997~2000년 닷컴 열풍 시기 ‘라이코스 코리아’ 등 벤처기업 10여 개를 세우거나 출자하면서 ‘국내 벤처 업계의 대부’로 불렸다.

◇”부의 대물림은 부끄러운 짓”

정 전 이사장은 미래산업이 상승 가도를 달리던 2001년, “착한 기업을 만들어 달라’는 말을 남기고 회사 경영권을 직원에게 물려줬다. 이후 회사 경영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그는 ‘부자인 채로 죽는 것은 너무나 부끄러운 짓’이라고 했던 앤드루 카네기 등에 감명을 받아 지속적이고 생산력이 있는 기부를 하겠다는 소신을 펼쳤다. 은퇴한 해 KAIST에 300억원을 기부했고 2012년 자신과 아내가 소유한 회사 주식을 모두 매각해 400억원을 현금화한 뒤 이 중 215억을 KAIST에 다시 한번 기부했다. 앞서 KAIST와 인연은 이광형 KAIST 총장이 젊은 교수였던 1996년 정 전 이사장을 찾아가 미래산업의 소프트웨어 개발을 도우면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고인은 특히 BT와 IT의 융합이 미래 먹거리가 될 것으로 보고 관심을 기울였다. 현재 KAIST에는 정 전 회장과 아내의 이름을 딴 ‘정문술 빌딩’과 ‘양분순 빌딩’이 바이오 및 뇌공학과 실험실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2남 3녀가 있지만 자녀 중 누구도 아버지가 창업한 미래산업과 관련을 맺지 않았고, 기부에도 모두 동의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정 전 이사장은 2007년 본지 인터뷰에서 “나도 인간이니까 ‘자식놈한테 물려주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솔직히 든다”면서도 “우리 애들은 내 기부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고인은 국민은행 이사회의장과 KAIST 이사장을 지냈고, 2014년 미국 경제 전문지 포브스의 ‘아시아·태평양 자선가 48인’에 선정됐다. 과학기술에 대한 공로로 과학기술훈장 창조장을 수상했다.

빈소는 건국대학교병원 장례식장 202호실. 발인 15일 오전 9시. (02)2030-7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