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로 소극장의 상징 '학전'을 30여년간 운영하며 후배 예술인을 배출해 온 가수 김민기씨./연합뉴스

‘아침이슬’ ‘친구’ 등을 부른 작곡가·가수였으며 대학로 소극장 문화의 상징과 같은 학전 소극장을 세워 33년간 운영했던 김민기(73)씨가 오래 앓아온 위암으로 21일 별세했다.

김민기가 지난 33년간 운영해 온 학전 관계자들은 22일 “김민기씨가 21일 오후 8시 20분쯤 세상을 떠났다”고 전했다. 김민기는 지난해 가을 위암 4기 진단을 받았다. 그의 지인들에 따르면 최근까지 경기 고양시 일산 집에서 통원하며 항암 치료를 받아왔지만 암세포가 간까지 전이된 상태라 시간이 갈수록 급격히 병세가 악화된 것으로 전해졌다.

김민기와 절친했던 가수 박학기는 “항암이란 게 아무래도 계속 할수록 체력이 떨어지다보니 형님이 자주 ‘힘들다’고 하셨다. 그래도 생각한 것보다 더 빨리 이별이 찾아와 충격이다”라며 “마지막까지 형님이 (故 김)광석이 기일날 하는 행사들과 재단 설립을 신경써서 잘해 달라고 당부하셨다”고 했다.

김민기는 1970년대 대표적 저항가요 ‘아침 이슬’의 작사·작곡가이자 가수. 1969년 서울대학교 회화과에 입학한 김민기는 1972년 서울대학교 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서 민중가요를 가르치다가 경찰에 연행돼 고초를 겪었다. ‘아침이슬’, ‘늙은 군인의 노래’ 등 그의 숱한 노래들이 시위 현장에서 불렸다거나 가사가 불건전하다는 등의 갖가지 이유로 금지곡이 됐다.

1973년 김지하의 희곡 ‘금관의 예수’의 극음악을 작곡해 첫 무대 공연 경험을 쌓은 김민기는 1974년 소리굿 ‘아구’의 대본 작업을 한 마당극 운동 1세대이기도 했다. 78년 노래굿 ‘공장의 불빛’, 84년 노래극 ‘개똥이’ 등이 심의에 막혀 정식 공연을 못 올리고 불법 음반으로 유통됐을 만큼 그의 청춘은 험난했다. 공장과 탄광에서 80년대를 보낸 그는 1991년 3월 15일 대학로 한 모퉁이에 소극장 ‘학전(學田)’을 세웠다. ‘배움의 밭’, 문화예술계 인재를 촘촘하게 키워내는 ‘못자리’가 되기를 바랐던 그의 초심이 담긴 이름이다.

소극장 '학전'을 운영해 온 김민기씨./연합뉴스

올 초 거듭된 경영난에 대표의 암 투병이 겹치면서 결국 폐관하기까지, 이 못자리에서 지난 33년간 다양한 분야의 예술 인재들이 자랐다. 학전이 기획·제작한 작품 359개 편으로 배출된 배우, 연주자, 스태프만 780여 명에 달한다. 설경구, 황정민, 김윤석, 조승우, 이정은, 장현성 등 굵직한 배우들이 이 소극장 무대에서 배우의 길을 다졌다.

대중음악계에도 학전이라는 못자리에 뿌리를 내린 모종들이 큰 나무로 자랐다. 1991~95년 학전에서 1000회 라이브 공연으로 이름을 알린 고(故) 김광석을 비롯해 들국화, 안치환, 이소라, 장필순, 윤도현, 성시경, 유리상자, 장기하 등이 학전에서 노래했다.

1994년 초연한 ‘지하철 1호선’은 대학로 소극장 뮤지컬의 전설이 됐다. ‘아침이슬’ ‘상록수’의 가수 대신 ‘학전 대표’로 불리길 원했던 김민기의 첫 뮤지컬 연출작. 그가 독일 뮤지컬 ‘Line1′을 한국어로 직접 번안한 극 속에는 베를린 대신 IMF 시절 서울의 풍속화가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4000여 회 공연 동안 73만명 관객이 들었고, “원작을 뛰어넘는 각색”이라며 1000회 차부턴 저작권료를 면제받을 정도로 호평을 받았다. 이 뮤지컬엔 청량리 588, 지하철 신문팔이, 운동권 대학생 등 90년대 말 서울 풍경이 담겨 있다.

2012년 ‘지하철 1호선’이 공연 3000회를 돌파했을 당시 그는 ”같은 공연을 1000번 이상 하는 건 예술이 아니라 미련한 짓이라고 질책한 분도 있었는데, 예술이 아니어도 좋다. 젊은 배우들과 연주자들이 이 짓을 하면서 큰돈은 못 벌어도 직업이자 자기 삶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됐으니 행복한 일”이라고 했다.

김민기와 학전의 또 다른 브랜드는 어린이 청소년극이었다. ‘우리는 친구다’(2004) ‘고추장 떡볶이’(2008) 등 어린이 공연들은 ‘김민기의 학전’이 추구한 정체성을 가장 잘 보여준 무대였다. 학전 소극장은 지난 17일 건물을 리모델링해 어린이·청소년 중심 공연장 ‘아르코꿈밭극장’으로 재개관했다.

개관식에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하 ‘예술위’) 정병국 위원장은 “어린이·청소년극은 수지 맞추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꾸준히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볼 만한 좋은 작품을 만들고 무대에 올리는 역할을 해온 게 학전과 김민기 선생이었다”며 “공공 부문에서 해야 할 일을 민간에서 했던 것이고, 이제 저희가 그걸 이어받아 해나가려 한다”고 했다. 아르코꿈밭극장은 169석 규모의 공연장 꿈밭극장(지하 2층)과 연습실·어린이 관객 교육 공간으로 쓰이는 텃밭스튜디오(3층), 책을 읽는 공간인 꽃밭라운지(2층) 등으로 구성됐다.

김광석 노래 경연대회 등 옛 학전의 대표 행사는 계속 이어갈 예정이다. 이날 정 위원장은 “어린이극 ‘고추장 떡볶이’, 뮤지컬 ‘지하철 1호선’ 등 학전을 대표하는 작품도 이어나가고 싶지만 김민기 선생에게 당장 허락을 얻진 못했다”며 “선생은 지속 가능성을 우려하시는 것 같다. 앞으로 아르코꿈밭극장이 자리 잡고, 또 많은 관객이 원한다면 그 때는 다시 공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었다.

유족은 배우자 이미영 씨와 2남. 빈소는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 2, 3호실. 발인은 24일 오전 8시, 장지 천안공원묘원.

학전 관계자는 “조문은 22일 오후 12시 30분부터 가능하며, 조의금과 조화는 고인의 뜻에 따라 정중히 사양한다”며 “빈소 및 발인 등 모든 장례 절차는 비공개로 진행한다. 가족들의 뜻을 헤아려 달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