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굴암 천장 꼭대기, 연꽃 모양 덮개돌이 세 조각으로 쩍 갈라져 있다. 그 옆으로 원을 그리며 끼워진 돌들이 마치 빛이 퍼져나가는 것처럼 경이롭다. 본존불의 왼쪽 어깨 아래에서 천장을 향해 한껏 치켜올린 앵글. 국내 문화재 사진 개척자로 꼽혔던 고(故) 한석홍(1940~2015)의 작품이다.
국보 제24호 경주 석굴암 내부를 생생히 들여다보는 사진집이 나왔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24일 펴낸 ‘석굴암, 그 사진’은 아버지가 찍고 아들이 기증해 만든 작품이다. 문화재 전문 사진작가인 한석홍이 1981년, 1986년, 2000년 세 차례에 걸쳐 촬영한 필름 1172장을 유족들이 지난해와 올해 기증했다. 아들 한정엽 한국문화재사진연구소 실장은 “선친이 남긴 사진들이 석굴암의 보존·복원을 위한 기초 자료가 됐으면 하는 바람에서 가족들과 뜻을 모았다”고 했다. 연구소는 기증받은 아날로그 필름을 고화질 디지털 자료로 변환해 사진 100여장과 배치도, 해설을 곁들여 사진집으로 펴냈다.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을 시작해 혜공왕 10년(774) 완성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세웠고 석불사(石佛寺)라 불렀다 한다. 백색 화강암을 이용해 인위적으로 석굴을 만들고, 본존불을 중심으로 주위 벽면에 보살상, 승려상 등 총 40점의 존상을 조각했으나 지금은 38점만 남아있다.
천장 덮개돌은 창건 당시부터 깨진 것으로 전해져 왔다. ‘삼국유사’는 1200년 전 세월의 이야기를 이렇게 전한다. “장차 석불(石佛)을 조각하려고 큰 돌 하나를 감실의 뚜껑으로 만들려고 하는데, 돌이 갑자기 셋으로 깨졌다. 대성은 분노하여 아무렇게나 잠들었다. 밤 중에 천신이 내려와서, 다 만들고는 돌아갔다.”
제주 서귀포 출신인 한석홍은 고 김대벽, 안장헌씨와 더불어 국내 3대 문화재 사진작가로 통했다. 김대벽이 건축물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고, 안장헌이 야외 불상 촬영으로 명성을 쌓았다면 한석홍은 실내 유물 촬영의 1인자로 꼽혔다. 1971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주최한 ‘호암 수집 한국미술특별전’ 촬영을 맡으면서 문화재 전문 사진작가의 길을 걸었고, 1976년 자신의 이름을 내건 ‘한석홍 사진연구소’를 설립했다. 문화재계에선 “2000년대 이전 국립박물관 도록 유물, 특히 국보 사진 대부분이 그의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국보급 사진작가”라고 꼽는다. 임영애 동국대 교수는 “사진 자료가 귀하고 인터넷이 없던 시절 미술사 연구자 가운데 그가 찍은 사진 도록을 옆에 두고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라고 했다.
한석홍이 석굴암과 인연이 닿은 것은 1981년. 일본에서 출간한 ‘세계의 미술’ 제2권 한국·동남아시아 편의 석굴암 사진을 맡으면서다. 임 교수는 “원래 그의 특기는 고려청자 촬영이었다. 고려청자 특유의 ‘비색(翡色)’을 잘 구현하려면 광택 때문에 생기는 반사를 잘 잡아내야 했는데, 그의 예민한 눈은 석굴암 조각의 깊이가 저마다 다르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고 했다. 본존불을 중심으로 석굴암 조각의 백미로 꼽히는 십일면관음보살, 위엄 넘치는 사천왕상, 개성 강한 승려상 등이 그의 셔터를 통해 새로 태어났다. 빛에 따라 달리 보이는 돌의 색깔도 적절한 광원의 색 온도와 조명으로 포착해 실내 유물 사진의 전범을 만들어냈다.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받아 문화재 사진작가의 길을 걷고 있는 한정엽 실장은 “지금은 유리에 가로막혀 석굴암 내부를 자유롭게 관람하기 어려운 현실이라 많은 분들이 이 사진집을 통해 석굴암 조각들을 감상하실 수 있다면 좋겠다”며 “필름은 온도 습도가 갖춰지지 않은 환경에선 보관이 쉽지 않아 나머지 사진들도 국가에 차차 기증할 생각”이라고 했다. 석굴암 사진집은 문화재청 홈페이지(www.cha.go.kr)와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http://portal.nrich.go.kr)에서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