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 식객’으로 불리는 요리 연구가 임지호(64)씨는 생모(生母)에 대한 기억이 없다. 세 살쯤 친어머니는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17~18세가 되고서야 그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길러주신 양어머니 역시 스물두 살 때 여의었다.
방랑은 일찍 시작됐다. 열두 살 때 경북 안동의 집을 나온 그는 라면집과 중국집·요정 등 전국 각지의 식당을 전전하며 요리를 배웠다. 1980년대 사우디아라비아 건설 현장에서 3000여 명의 식사를 책임졌고, 호텔 주방장으로도 근무했다.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함바집을 하다가 빚을 지기도 했고, 통닭집을 인수했다가 망한 적도 있다. 우여곡절 끝에 요리사가 됐지만, 그는 “부모님께서 살아계실 때 음식을 차려드린 적이 없다는 사실이 언제나 마음에 남았다”고 말했다.
SBS 스페셜 ‘방랑식객’과 KBS 인간극장 같은 방송으로 친숙한 그가 이번엔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 된다. 10월 7일 개봉하는 ‘밥정’(감독 박혜령)은 임씨의 인생 역정과 음식 철학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밥정’은 밥으로 나누는 정(情)이라는 뜻이다. 제목처럼 그가 지리산과 제주도 등 방방곡곡을 누비면서 자연의 식재료를 구하고, 현지인들을 위해 정성껏 한 끼 식사를 준비하는 모습이 담겼다. 28일 시사회 직후 만난 그는 “요리는 온전하게 먹는 사람의 도구가 되는 일”이라며 “그래서 귀한 음식을 차릴 때는 미리 입에 대거나 간을 보지도 않는다”고 했다.
“자연에서 나는 것은 아무것도 버릴 것이 없다”는 것이 그의 음식 철학. 다큐멘터리에서도 그는 잣나무의 방울을 끓여서 우려낸 국물로 국수를 만들고, 낙엽과 돌이끼, 엄나무의 가지도 식재료로 활용한다. 낙엽을 잘게 빻아서 찹쌀과 밀가루에 반죽한 뒤 솔잎을 넣고 구워서 과자를 만드는 방식이다. 임씨는 “우리 주변의 식재료는 자연이 키워준 축복의 선물”이라고 했다. 이렇듯 과감하게 자연을 밥상에 끌어들인 창의적 발상으로 그는 2003년과 2006년 미국 뉴욕의 ‘한국 음식 축제’에 초청받았다. 2006년 미국 요리 잡지 ‘푸드 아트’의 표지 모델로도 선정됐다.
코로나 바이러스 시대에 건강한 식생활에 대한 고민이나 관심도 높다. 하지만 그는 “바쁘다는 핑계로 점점 더 가공된 인스턴트의 편리함에 길들여지고 있는 건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임씨는 “우리 밥상에서 날것과 익힌 것, 새로운 것과 오래된 것의 균형과 조화가 깨지고 있다”면서 “일주일이나 열흘에 한 번이라도 온 가족이 자연에 함께 나가서 직접 흙을 밟고 식재료를 채취하는 즐거움을 누려야 한다”고 말했다.
다큐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2009년 지리산에서 처음 만났던 김순규 할머니의 부음 소식을 듣는다. 고심 끝에 그는 할머니의 지리산 집에 찾아가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전과 과일, 나물과 생선 등이 담긴 100여 개 접시 분량의 음식을 준비한다. 임씨가 대청마루에 한가득 차린 상을 보면서 할머니의 가족들은 눈물을 쏟는다. 임씨는 “내게는 낳아주신 어머니, 길러주신 어머니, 길에서 만난 어머니라는 세 분의 어머니가 존재하는 것 같다”고 했다. 인터뷰에서 그는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 반드시 버려야 할 두 가지와 간직해야 할 세 가지 마음가짐을 꼽았다. “허영심과 거짓된 마음은 버리고, 부지런함과 평정심, 재료를 판단하는 매의 눈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