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관문을 들어서자 현판처럼 걸린 ‘운심석면(雲心石面)’ 글씨가 보였다. 서예가 유희강이 마비된 오른팔 대신 왼손을 연마해 쓴 좌수서(左手書)다. 실내는 미술관을 방불케 했다. 1층에는 ‘폭풍의 화가’ 변시지의 바람 몰아치는 듯한 제주, 산수화로 유명한 민정기의 인왕산 그림과 김충현·응현 형제를 비롯한 한국 대표 서예가들의 글씨가 걸렸다. 2층으로 올라가니 이우환의 유화와 이응로가 설악산 개울 돌에 그린 그림이 보인다. 정원에 걸린 나룻배 조형은 김원숙 작품. 미국 일리노이 주립대가 예술대학을 ‘김원숙 칼리지’로 명명한 일을 기념하는 모임이 이 집에서 열린 날 김 화백이 직접 걸어줬다.

미술품들과의 인연을 설명하고 있는 김용원 삶과꿈 대표. 왼쪽에 위아래로 걸린 그림은 박고석, 그 옆은 이우환, 나머지 두 그림은 안영일 작품이다. /이태경 기자

이곳은 김용원(85) 도서출판 삶과꿈 대표 가족의 ‘갤러리 주택’. 김 대표가 오래 살아온 서울 평창동 집 마당에 지었다. 김 대표는 조선일보 편집국장 출신의 언론인이자 대우전자 사장을 지낸 기업인. 미술계에선 20대부터 그림 보는 안목을 키워온 수집가로 유명하다. 60년 가까운 수집의 기록을 최근 ‘구름의 마음, 돌의 얼굴’이란 책으로 펴냈다. 김 대표는 “미술 작품과의 만남도 인연”이라면서 “내가 쫓아다니고 좋아했던 그림의 세계가 곧 내가 살아온 흔적”이라고 했다.

이 책은 개인적 기록인 동시에 수집가의 눈으로 본 한국 현대 미술사다. 동양화 위주였던 1960년대 인사동 화랑가 풍경부터 조선일보에 천경자 화백의 아프리카 기행 연재를 성사시킨 일, 미디어 아티스트 백남준이 한국 첫 전시를 열던 무렵 화랑을 통해 “이거 김용원에게 주라”면서 컵받침에 그림을 그려 준 일까지 흥미로운 일화가 가득하다. “자료를 꼼꼼하게 모아놓질 못하다 보니 쓰는 데 6년이 걸렸습니다. 젊어서 기자 생활 하던 기억대로, 미술관을 비롯해 자료가 있는 곳을 발로 뛰어서 썼죠.”

학창 시절, 선생님이 ‘운동장에서 교문으로 내려가는 길을 그리라’고 해서 그려보면 올라가는 길이 되고 말더라는 그가 그림을 모으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경제부 기자 시절. 박상옥(1915~1968) 화백 개인전에서 구입한 ‘안개꽃’이 첫 작품이었다. “고교 은사였던 박 화백 전시회에 들렀다가 그냥 나오기 뭣해서 당시 한 달 월급쯤 되는 돈을 주고 샀죠. 대가들 그림조차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고, 그림 값도 쌌던 시절에 그렇게 시작했어요. 마침 경제부 옆자리가 문화부여서 미술 담당 기자와 어울리며 그림에 빠져들었죠.”

김 대표는 “특정 작가나 장르에 치우치지 않고 마음이 가는 것을 모았다”고 했다. 동·서양화와 조각, 서예, 민예품에 이르는 컬렉션 가운데 특히 기억에 남은 작품은 뭘까. 유명 작가의 작품이 아니라 “나를 떠나간 그림들”이라고 했다. “현실적으로 어려울 땐 그림을 팔았죠. 아쉽기도 하고 모처럼 나에게 왔는데 미안하기도 했어요. 조각가 권진규(1922~1973)의 ‘새’처럼 보낼 수 없는 작품들도 있어요. 돌아가실 때 유서를 새의 발치에 뒀다고 하는데 차마 그것만은 내 손으로 내보낼 수가 없겠더라고요.”

그는 “이 작품들이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식들에게 물려준다는 생각도 해본 적 없다”고 했다. “기회가 된다면 이 집을 개방해 사람들이 그림을 즐기고 공부도 하며 어울리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어요. 그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작게나마 도움이 된다면 흔쾌히 내놓을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