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현지 시각) 오후 영국 런던 지하철 오벌역 근처의 한 댄스 스튜디오. 머리카락을 노랑⋅파랑⋅보라⋅초록으로 물들인 네 소녀가 전신 거울 앞에 모여 춤 연습에 한창이었다. K팝이 흘러나왔고 이들은 리듬에 맞춰 한 치 오차도 없이 ‘칼군무’를 선보였다.
한눈에 봐도 영락없는 외국인인 이들은 유럽 최초의 K팝 걸그룹 ‘가치(KAACHI)’다. 영국인 다니(22)와 스페인 출신으로 영국에서 자란 니콜(21)과 준서(20), 그리고 한국인 코코(26)로 꾸려졌다. 지난 4월 내놓은 데뷔곡 ‘유어 턴(Your Turn)’이 유튜브에서 조회수 1200만을 기록하며 돌풍을 일으켰다. 반년 만에 두 번째 싱글 ‘포토 매직(Photo Magic)’ 발표를 앞두고 막바지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저희 모두 한국 아이돌 그룹 샤이니를 보고 자란 ‘샤이니 세대’예요.” 준서는 2010년 전후로 인기를 끈 아이돌 그룹 샤이니와 빅뱅의 노래를 들으며 K팝에 푹 빠졌다고 했다. 니콜은 “이른바 칼군무라 불리는 그룹 댄스, 4분짜리 무대를 하나의 예술로 만드는 K팝 그룹의 강렬한 퍼포먼스를 보고 사랑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고 거들었다.
K팝을 동경하며 런던에서 한국 아이돌 커버 댄스팀으로 활동하던 니콜과 준서에게 작년 10월 꿈만 같은 기회가 찾아왔다. 런던에서 열린 K팝 댄스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 당시 현장을 찾았던 기획사 프론트로우(Frontrow) 이혜림 대표는 “유러피언 K팝 걸그룹을 구상하던 차에 둘의 실력을 보고 바로 캐스팅했다"며 "이후 랩 파트 멤버로 다니를 영입하며 하나씩 준비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팀은, 이화여대에서 한국무용을 전공하고 영국에서 독립 예술가로 활동하던 코코가 마지막에 합류하면서 완성됐다. ‘가치를 같이 만들자’는 뜻에서 그룹 이름이 ‘가치(KAACHI)’가 됐다.
이들의 등장은 뜨거운 논란을 일으켰다. 일부 K팝 팬은 이들이 K팝 그룹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멤버 상당수가 한국인이 아니며 데뷔곡 가사가 대부분 영어라는 이유에서다. BTS⋅블랙핑크처럼 혹독한 연습생 기간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인정할 수 없다는 말도 나왔다. 코코는 “결국 ‘K팝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까지 이어졌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볼 여지도 있다”며 “이 과정에서 K팝이 한층 더 깊어지고 단단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가치를 둘러싼 논란에도, 멤버들은 외국인 K팝 팬의 희망이 되고 싶다고 했다. 그동안 K팝 가수를 꿈꾸는 외국인 친구들이 꿈을 포기하는 경우를 많이 봤기 때문이다. 데뷔 전 JYP⋅YG 등 대형 기획사의 오디션에 참가했다가 쓴맛을 봤다는 다니는 “10년 넘게 K팝을 사랑해왔지만 특히 외국인이 한국에서 K팝 가수가 되는 일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일”이라며 “지금은 누군가 나를 보고 자신의 꿈을 계속 이어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 임하고 있다”고 말했다. 니콜은 “수많은 해외의 K팝 팬에게 포기하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싶다”며 “그들을 위해서라도 가치는 K팝 그룹으로 끝까지 해낼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