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따 우리끼리 술 한잔할 건데, 그 짝도 오려면 오던가.”
한 4개월 만이었다. 미국과 영국 등지에서 주로 활동하는 사진작가 MJ KIM(김명중·48)이 지난해 말부터 서울 을지로에 터를 잡은 뒤, 을지로 공업사 사장님들이 그에게 말을 트기 시작한 때가. 재개발로 오랜 터전이었던 을지로를 떠나거나, 떠나야 할 사람들에게 타지인의 등장은 반갑지만은 않은 존재였을 것이다. 김명중 작가는 그들에게 사진기 대신, 그저 “소주 한잔 하러 왔습니다”라는 인사를 건네며 을지로 밥집을 무던히 돌았다. 매일 출근도장을 찍고 3개월여 지났을 때, 한 공업사 사장님은 물었다. “그래서 자네는 뭐 하는 사람인가?”
‘폴매카트니 전속 작가’로 이름난 김명중 작가는 그동안 찰스 왕세자, 데이비드 베컴 부부, 마이클 잭슨, 무하마드 알리 등 유명 인사들의 사진을 찍어왔다. 국내에선 방탄소년단(BTS) 등과 다수의 작업을 했다.
오는 11월 2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1관에서 무료로 열리는 전시 ‘어이 주물씨, 왜 목형씨’는 ‘을지로체(2019)’와 ‘을지로10년후체(2020)’를 발표한 배달의민족(이하 배민)이 사진작가 김명중과 손잡고 선보인 ‘을지로에 관한 기록’이다.
전시장에서 만난 배민 운영사 김봉진 우아한형제들 대표는 “도시의 상징이 간판이고, 간판의 얼굴이 글꼴”이라면서 “옛것을 지키면서 성장과 쇠퇴, 부활을 반복하는 을지로에서 영감 받은 서체를 개발하면서, 우리의 현대사가 그대로 녹아있는 을지로라는 공간과 사람에 주목해 사진 작업을 의뢰하게 됐다”고 말했다. 주로 스타들과 작업한 김명중 작가 역시 현대사를 일으키는 주요 주춧돌이었던 무명 장인들의 손길에 빠져들었다. “후대에 남길 필요가 있다”는 말로 손사래 치는 이들을 설득했다. “영정 사진 찍으려고 햐?”라는 몇몇 사장들의 마음을 연 우스개가 이어진 뒤 김 작가의 사진 작업이 시작됐다.
전시회 제목이 된 ‘주물씨’ ‘목형씨’는 오랜 친구 사이인 주물 사장님과 목형 사장님이 서로를 부르는 말. 이름 대신 필생의 업을 이름으로 부르는 이들이 “어이 사진씨”라고 말을 건넸을 때, 김 작가는 드디어 셔터를 자신 있게 누를 수 있었다. 손잡는 게 민망해 손등만 겨우 댄 형제 사장님과 2대째 이어오는 사장님들, 기계는 글로 배우는 게 아니라 어깨너머로 배우는 게 제일이라는 금형 사장님, 1988년 호돌이 배지를 만든 창신조각 사장님, 또 창신조각 사장님의 아내이자 김 작가의 을지로 안착 1등 공신인 백만불 식당 사장님….
배민과의 협업은 서로 이야기한 것도 아닌데 마치 계획된 듯 진행됐다. 을지로 무명 장인들의 붓글씨 간판에서 영감 받은 배민의 ‘을지로체’가 세월을 먹어 낡고 군데군데 이가 빠진 듯한 글자가 된 것이 바로 ‘을지로10년후체’. 수개월간 을지로를 돌아다니던 김 작가의 머릿속에 맴돌던 것 역시 ‘시간의 깊이’였다. 평소 작업하던 디지털 카메라를 버리고, 아날로그 필름 카메라를 들었다. 특히 전시 마지막엔 33인의 초상을 100년 넘은 구식 카메라 속 폴라로이드 필름에 담았다. “철공소 장인분들이 쇳물에 몸을 데이면서도 직접 쇠를 깎고 흙으로 주물을 만드는 작업을 모습을 보면서 간편한 디지털 카메라를 들 수 없었어요. 폴라로이드 사진 속 어떤 곳은 벌겋게 색이 바래고, 어떤 것은 희뿌옇게 인화되는 모습이 희미해져 가는 인생의 찬란했던 추억을 담은 것 같았어요. 세월에 따라 사진도 나이를 먹는 것이죠.”
작업 경과를 보여주려, 또 세종문화회관에 작품이 걸리게 됐다는 소식을 전하려 을지로 사장님들을 다시 찾았을 때, 그들은 김 작가의 손을 포옥 감싸며 말했다. “을지로에 숱하게 많은 사진가가 왔었는데, 사진씨처럼 다시 찾아온 사람은 거의 없었어. 친구들에게 자랑스레 말해야겠어. ‘그짝도 보러 올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