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청씨 제공.

영화 해리포터 촬영지로 널리 알려진 영국 옥스퍼드대 보들리언도서관에는 영조의 장례 행렬을 그린 반차도(班次圖)를 비롯해 18세기 제작된 세계 지도부터 고종 대(代) 의 해시계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유물 3만여 점이 소장돼 있다. 수장고 속에서 방치돼 있던 유물을 발굴해 10여 년 전부터 세상 밖에 내놓은 건 베트남 출신의 사서 민청(63)씨다. “한국 자료 연구하는 재미에 푹 빠졌다”는 그와 최근 전화와 이메일로 만났다.

영국 옥스퍼드대 보들리언도서관 전경. /보들리언도서관 블로그

한국 유물이 가득한 이유가 궁금했다. 민청씨는 “보들리언도서관은 대영박물관(1753년)보다 약 150년 빠른 1602년 공식적으로 문을 열었는데 과거엔 일종의 박물관의 역할을 해왔다”며 “다양한 한국의 자료가 이곳에 소장돼 있는 이유”라고 말했다. 한국 자료는 개항 초기 조선을 방문했던 국교회 주교들을 통해 19세기 후반부터 수집됐다고 한다. 보들리언도서관은 초기 버전의 마그나카르타, 구텐베르크 성경, 셰익스피어 퍼스트폴리오와 같은 귀중본을 포함해 1300만점의 자료를 갖고 있다.

창고에 쌓여있던 방대한 한국 유물이 빛을 발하게 된 건 오롯이 민청씨의 관심과 노력 덕분이다. 그가 손을 대기 전까지 보들리언도서관에는 한국 지식을 가진 전문가가 부족해 연구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고 한다. 더럼대학교 도서관 사서로 일할 당시 한국 자료를 발굴해 한국 섹션을 만들어본 경험이 있는 민청씨는 2001년 옥스퍼드대로 옮기면서 이곳에서도 관련 연구를 시작했다. 그는 “당시 제목이나 저자 같은 세부 사항도 없이 한국책(Korean book)이라는 라벨만 붙어 중국 자료에 끼어있는 일이 다반사였다”며 “직접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정리한 끝에 2013년 한국 국립중앙도서관과 함께 이곳에 한국관을 공식적으로 개관했다”고 말했다.

그가 발굴한 자료는 영조의 장례 행렬을 그린 ‘국장도감의궤 반차도’를 비롯해 고종 황제를 위해 만든 해시계, 안정복이 그린 세계 전도(영고양계요동전도)부터 영국 선교사 존 로스의 최초 한글판 성경 번역본(예수성교문답),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비인 이방자 여사가 만든 칠보 접시 등 수천 점에 이른다.

18세기 조선 영조 장례 행렬을 그린 그림. /보들리언도서관

연구를 통해 잘못된 정보도 바로잡았다. 영조의 장례 행렬을 그린 그림(국장도감의궤반차도)이 대표적 예다. 당시 동봉된 기록에는 1890년 조 대비(신정왕후)의 장례 행렬이라고 쓰여 있었지만 민청씨는 이에 의문을 품었다. 그는 “도서관에 기증된 연도(1902)를 고려할 때 12년 전 작품이라고 보기엔 너무 오래돼 보였다”며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의 도움을 얻어 공식 의궤와 비교한 끝에 이보다 110여년 앞선 18세기 영조 장례식이라는 걸 확인했다”고 말했다.

이 같은 연구 결과물로 그는 지난 2011년과 2018년 옥스퍼드의 한국의 보물들이라는 책 두 권을 발간했다. 올해는 첫 성과물이 나온 지 10주년이 되는 해다. 이에 맞춰 후속편을 내기 위한 연구가 한창이라고 했다. 그는 “최근 유물을 정리하다가 1744년 만들어진 화포(불랑기자포)를 발견했는데 같은 이름을 가진 화포가 이미 한국에서 보물로 지정돼 있다고 들었다”며 “연구할수록 귀중한 자료가 계속 나오니 연구를 소홀히 할 수 있겠느냐”고 웃었다. 아직 들여다보지 못한 유물이 더 많다. 올해는 보들리언도서관 외에도 옥스퍼드대 내 다른 도서관과 박물관에 보관돼 있는 한국 유물을 살펴볼 예정이다. “귀중한 자료를 발견하고 나면 감동이 밀려옵니다. 아름다운 한국 유물의 감동을 다른 사람들도 즐길 수 있게 되길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