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8일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개인 와인 저장고 ‘까브 481’. 와인병 90개가 놓인 탁자에 한 여성이 앉아 각 와인을 입에 머금고 살짝 가글하듯 맛을 느꼈다가, 옆에 있는 통에 뱉고 노트에 메모를 한다. 한 와인당 이 동작에 들어가는 시간은 1분 정도다.
그는 아시아계 최초 ‘마스터 오브 와인(MW)’ 지니 조 리(53)다. MW는 영국 마스터 오브 와인 협회가 주관하는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와인 자격증. 1953년부터 전 세계 300여 명만이 이 자격증을 획득했다. 그는 2008년 이 자격증을 땄다. 영국 와인 잡지 ‘디켄터’가 선정한 2013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와인 전문가 25위이기도 하다.
이날 행사 이름은 ‘보르도 엉 프리뫼르’. 아직 시장에 내놓기 전인 그해 와인을 미리 전문가와 구매자에게 소개하는 자리다. 원래는 매년 4~5월 보르도에서 열리는데 올해는 코로나 사태로 못 가게 되자 보르도 300여 와이너리에서 그가 있는 한국으로 평가해달라고 보낸 것이다.
“2020년산 보르도는 확실히 품질이 좋은 거 같아요. 최근 보르도는 ‘기후변화’로 가뭄이 심했는데, 드디어 와인 생산자들이 변화된 기후에 맞게 와인 만드는 법을 깨달은 것 같아요.”
그는 원래 정치학도였다. 1968년 서울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민한 후 스미스여대와 하버드대(석사)를 졸업했다. 그가 와인에 눈을 뜬 건 1988년 영국 옥스퍼드대로 교환학생을 갔을 때다.
“원래 술은 안 좋아했어요. 옥스퍼드대엔 칼리지마다 교수와 학생들 마시라고 지하에 와인셀러가 있어요. 여기서 1982년산 샤토 딸보를 마셨는데 반해버렸지요.”
첫 직장은 홍콩 경제전문지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FEER)’. 여기서 기자로 일하며 시간제로 와인 잡지 ‘와인스펙테이터’에 기고했다. FEER가 문을 닫으며 자연스럽게 와인이 전업이 됐다. 그가 MW에 도전하게 된 건 우연히 저녁 자리에서 세계적인 와인 평론가이자 MW를 가진 젠시스 로빈슨을 만나면서부터다.
“로빈슨이 아직 아시아계 MW는 아무도 없다며 추천서 써주겠다고 시험 쳐보라고 하더라고요. 시험을 치려면 MW의 추천서가 필요하거든요.”
멋 모르고 도전한 공부는 힘들었다. 보통 사람들은 하던 일도 그만두고 3~4년을 준비한다. 그는 아직 기자 일을 그만두기 전이었고, 엄마 손이 필요한 어린 딸 넷이 있었다. “5~6년간 3~4시간만 잤어요. 엑셀 파일로 해야 할 일들을 정리했지요. 아이들은 한 살 때 먹는 게 다르고 두 살 때 먹는 게 달라요. 막내 둘은 쌍둥이인데 모유를 먹였거든요. 시간별로 해야 할 일을 안 적어 놓으면 기억도 못 해요.”
시험은 나흘 동안 치러진다. 오전에는 12개 와인을 블라인드 테스트하고, 오후에는 질문에 따라 긴 답변을 쓴다. 전 세계 와인의 역사, 품종과 땅의 성격, 빈티지마다 특성 등을 모두 알아야 합격권에 든다. “블라인드 테스트는 12개 와인 중 8개는 정확히 맞혀야 하고, 4개는 가깝게만 맞혀도 통과할 수 있어요. 다만 2시간 15분 안에 와인당 평론을 두 장씩 써야 하니깐, 시간이 부족하죠.”
그가 가장 좋아하는 와인은 ‘부르고뉴의 여왕'으로 불리는 르루아(Leroy)가 만든 ‘도멘 르루아’ 와인이다. 르루아는 생전 처음으로 그의 책에 서문을 써주기도 했다.
“올해로 89세인데 아직 정정하세요. 몇 시간의 와인 시음을 하이힐 신고 하신다니깐요. ‘도멘 르루아’가 너무 비싸다면, 르루아가 직접 소유하지 않은 포도밭 포도로 만드는 ‘메종 르루아 부르고뉴 루주’를 추천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