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애 류성룡이 쓴 ‘징비록’을 읽고 ‘군대가 약할 때 나라가 어떻게 되는지 알게 됐다’며 눈물 섞인 독후감을 쓰던 MZ세대(20~30대) 장병들을 잊을 수 없어요. 그때마다 형언할 수 없는 보람을 느낍니다.”
서진영(53) 자의누리경영연구원장은 2019년 3월부터 육군 장병 43만명에게 ‘백군대학(百軍大學)’이란 교육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백군대학'은 군 복무 중 인문·경영·안보·글로벌 트렌드 분야의 양서(良書) 100권을 읽는 군사 대학을 목표로 한다.
“2000년부터 우리 연구원이 매월 4개씩 내고 있는 1000권가량의 ‘CEO서평’ 빅데이터를 활용해 장병들에게 유익한 필독서 100권을 매년 새롭게 선정해 모바일 앱으로 제공합니다.”
훈련소 수료 후 자대에 배치된 장병 가운데 희망자에 한해 자발적으로 모바일 앱을 깔고, 일과 후 휴대전화 이용 가능 시간(오후 6~10시)에 전자책 형태로 서평을 읽고 독후감을 쓰는 방식이다. 영어 동영상 강의도 들을 수 있다.
“군대를 대학 같은 교육기관으로 운영하는 이스라엘을 벤치마킹했습니다. 군 생활이 미래를 준비하는 소중한 시간이 되도록 돕는 방법을 찾다가 ‘백군대학’을 시작했죠.”
서 원장은 서울대 경영대 비전임 교수로서 22년째 경영학개론 강좌를 맡아 가르치고 있다. 서울대와 성균관대에서 경영학·철학 박사 학위를 각각 받은 그는 “근본적으로 사람은 책을 읽어야 인간이 된다. 그것도 좋은 책을 깊이 있게 읽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만 26세에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군에 입대해 강원도 강릉에서 취사병으로 복무한 그는 “군 생활이야말로 높은 집중도로 책을 읽을 수 있는 절호의 시간과 공간”이라고 했다.
“취사병 보직을 맡아 다른 장병들보다 한 시간 일찍 일어나야 했어요. 하지만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여러 역할이 모여 사회를 이룬다는 삶의 진리를 체득했고, 책도 여러 분야를 읽을 수 있었죠.”
그러나 입대 전 교통사고로 다친 목 디스크가 재발해 6개월여 만에 의병제대(依病除隊)해야 했다. 동료 장병들과 후배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그래서 지금까지 틈날 때마다 장병들을 대상으로 한 모든 특강을 무료로 하고 있다.
서 원장은 ‘난중일기’ ‘국화와 칼’ 같은 안보·인성 함양 서적 40권과 ‘구글의 미래’ 등 4차 산업혁명 및 경영서 40권, 매달 최신 도서 1권씩 총 20권으로 100권을 구성해 ‘백군대학' 콘텐츠로 만들었다. 이는 민간 기업과 최고경영자들에게 연간 유료 회원제로 공급하는 ‘CEO서평’과 동일하다.
육군 사병과 장교가 함께하는 ‘온라인 서평 경진대회’도 열고 있다. 독후감과 동영상(UCC), 낭독, 영어 발표, 파워포인트(PPT) 등 7개 부문으로 진행해 수상자에겐 상금과 포상 휴가 등을 준다. “지금까지 육군 1기갑여단에서 세 번, 8군단에선 두 번 열었어요. 참가 군인들의 뜨거운 열정과 우수한 발표 내용을 접하면서 우리나라의 미래를 낙관해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죠.”
구글 분석에 의하면 ‘백군대학’ 앱을 설치한 장병들 가운데 13%는 매일 ‘백군대학’에 접속한다. 그중 2시간 이상 앱으로 학습하는 장병이 50%에 달한다. 군 안팎에서 삭막한 병영 문화 개선에 일조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군 장병 개인 정보나 군사 정보는 접근도 하지 않습니다. 암호 처리돼 승인받은 장병들에게만 익명으로 콘텐츠를 제공합니다. 공익을 위해 봉사한다는 마음이어서 비용도 모두 사비(私費)로 쓰고 있죠.”
서 원장은 “부대에 갈 때마다 풋풋했던 군 시절의 열정과 초심이 떠오른다”며 “장병들이 ‘백군대학’ 서평과 책을 읽은 뒤 국가관, 인생관,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는 걸 접할 때 말로 표현하기 힘든 보람과 기쁨을 느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