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 영한사전은 영어 단어의 맛이나 느낌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죽은 사전’이에요. 그래서 ‘살아 숨 쉬는 사전’을 쓰기로 결심했지요.”
미국에서 정신과 의사로 활동하고 있는 이원택(74)씨는 번역을 제대로 공부해본 적이 없다. 그런 그가 5년을 매달린 끝에 지난 4월 영한사전을 냈다. 제목은 ‘이원택의 미-한[변형] 사전’. 이메일로 주고받은 대화에서 그는 “영문 번역을 위해 한·영, 영·한 사전을 뻔질나게 들춰봤다. 그러다 한계에 부딪혀 직접 사전을 쓰게 됐다”고 했다.
그의 사전은 이전에 없던 방식을 따랐다. 영단어를 우리나라에선 익숙한 학업 성취도 평어인 ‘수·우·미·양·가’로 나눈 것이다. 등급을 매겼지만 좋고 나쁨에 따른 것은 아니다. 한국어로 대체할 수 없는 영단어는 ‘수', 한국말로 번역이 부자연스러운 단어는 ‘우', ‘트렌드(trend)’처럼 이미 한국어같이 자리 잡은 단어는 ‘미'로 구분했다. ‘양’이 붙은 단어는 한국말로 쉽게 대체할 수 있는데 과시용으로 그대로 쓰는 영단어, ‘가’는 한국어를 파괴할 수 있는 말이다.
예를 들어 생물학을 뜻하는 영단어 ‘biology’를 그는 ‘가1(한국 문화를 손상시킬 수 있는 말)’로 분류해 놨다. 이유를 물으니 “중·고등학생은 일상에서 그냥 ‘생물’이라고 하는데, 대학생·대학원생이 되면 굳이 영어로 ‘바이알러쥐(biology)’라고 하지 않느냐”며 “한국의 지식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위화감을 주려고 쓰는 말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나도 등급이 헷갈릴 적 많았다. 그놈의 수우미 때문에 머리털이 다 빠졌다”고 농했다.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1975년 미국에서 인턴 과정을 수료했다. 1980년 롱비치에서 개인 병원을 열었다. “어릴 적 꿈은 소설가였지만 아버지 뜻에 따라 진로를 바꿨다. 대부분 한국 사람들처럼 가난에 시달리며 자라다 보니 돈이 철천지원수라 미국에서 생활하게 됐다”고 했다. 하지만 정신과에서도 ‘노인 정신'을 전공한 그는 “앞으로 노인의 세상이 올 거란 선견지명이 있었는데, 노인들은 병원에 몇 번 오다가 곧 사라진다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 뭡니까!” 하며 “돈벌이가 시원치 않다”고 익살스럽게 덧붙였다.
한 마디씩 할 때마다 표현이 예사롭지 않았는데, 이유가 있었다. “환갑이 되면서 그동안 돈 때문에 못 했던 작가의 길을 걸어가 보기로 했지요.” 2010년 수필로 등단한 데 이어 2년 뒤 시로 등단했다. 2015년 평론까지 섭렵했다. “평론하는 분들이 내가 쓴 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트집을 잡는 게 아니꼬워서 억지로 등단했어요.”
고생 끝에 사전을 4000부 찍었지만, 요즘 종이사전을 보는 사람이 없어 걱정이다. “영어 선생님들을 위해 기증을 하려고 해도 받아줄 기관이 없더라”고 했다. “유네스코에 문의하니 ‘북한에 보내면 어떨까요?’라고 하데요. 사전을 무슨 구호품처럼 생각해요.” 그래도 도전은 끝나지 않는다. 내년 1월 ‘어원 사전’ 출간을 계획하고 있다. 그는 “영어의 뿌리를 캐보면 각 단어를 따로따로 외울 필요가 없다”며 “사람들이 외국어를 쉽게 배울 수 있도록 도움이 되는 사전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