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이 볼 땐 제 영화나 사진이나 거기서 거기일 거예요. 저란 창작자의 속성 때문이죠. 누구는 접어놓은 방수포가 하나도 안 아름답다고 하겠지만, 제 포인트는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 것에서 찾아낸 아름다움이에요. 영화 ‘아가씨’의 흉악한 세계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아냈듯 제 사진도 그럴 겁니다.”
영화감독 박찬욱(58)이 ‘영화의 도시’ 부산에서 사진작가로 변신해 ‘관객’들과 만난다. 오는 12월 19일까지 부산 국제갤러리에서 열리는 첫 개인전 ‘너의 표정(Your Faces)’이다. 1일 전시장에서 만난 그는 “영화는 각본이 짜여져 있고, 때론 감독이 설명도 하고, 카메라도 다양한 장치로 움직임을 확장하지만 사진은 정해진 한 순간의 이미지, 오히려 단순해서 역설적으로 관객이 영화보다 더 큰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했다.
영화 ‘스토커’를 촬영하던 2013년부터 최근까지 그가 직접 찍은 사진 30여 점을 선보인다. 영화를 찍을 때처럼 구도는 물론이고 조명과 질감까지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그만의 색깔이 묻어난다. 가지가 앙상할 정도로 볼품없는 관목은 박 감독의 손을 거쳐 조명을 받고 주인공처럼 되살아났다. 그는 “이날의 하늘과 빛, 조명이 똑같은 나무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인공처럼 돋보이는 순간을 만들어냈다”고 했다.
스페인의 한 주유소에서 주유기 두 대가 꽂혀 있는 모습을 보곤 두 명의 얼굴 표정을 떠올렸다. 모로코 여행 중 새벽 산책길에 본 어느 레스토랑의 접혀있는 파라솔 10여개 에선 이슬람 유령을 잡아냈다. 변산반도의 바위는 머리카락과 턱수염이 난 남자의 옆얼굴을 닮았다. 박 감독은 “사진 속 피사체와 내가 일대일로 만났을 때 내가 느낀 감정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관객들도 저마다 다른 생각과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오래된 소파를 찍은 ‘워싱턴 DC(2013)’는 스스로의 경험을 투영한 사진이다. “영화 ‘박쥐’ 홍보로 워싱턴 DC에 갔을 때였어요. 일정이 많아 지쳐 있었는데, 관객과의 행사를 마치고 대기실에서 저 소파를 봤죠. 만사를 제쳐두고 앉아서 쉬고 싶던 제 느낌이 그대로 담긴 사진이에요.”
그는 평소 영화를 찍을 때도 관객이 손으로 만지고 냄새를 맡는다고 착각할 정도로 디테일한 질감 표현을 강조한다. 사진도 그런 점을 최대한 살렸다. 발리의 해변에서 본 바위는 그에게 공포영화 속 괴물처럼 다가왔다. 그런 형상을 표현하기 위해 바위 표면의 거친 질감이 도드라지도록 찍었다.
그에게 사진은 영화감독이라는 무게를 잊게 해주는 돌파구였다. “평소 성격이 내성적이고 조용한 걸 좋아해 여행도 안 좋아한다”며 “일 때문에 해외를 다니고 많은 사람을 만날 때마다 혼자서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사진을 찍은 게 나를 버티게 해준 힘이었다”고 했다. “영화는 여럿이 함께한다는 점이 좋기도 하지만 손발이 맞지 않을 땐 한없이 힘들다”며 “몇십억, 몇백억씩 들어가는 돈까지 생각하면 잠이 안 온다”고도 했다. “사진은 못해도 나만 피해를 보니, 사진만 하는 분들보단 내가 더 즐겁게 찍는 사진작가일 것”이라며 웃었다.
박 감독은 자신의 사진을 볼 때 영화를 떠올릴 필요는 없다고 했다. “철저히 계산돼 만들어진 영화 속 인물들과 우연과도 같은 찰나의 만남으로 찍은 사진은 달라요. 관객들이 제 사진을 보고 저마다 느끼는 감정들이면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