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열린 ‘이중섭미술상’ 시상식의 주인공 곽훈 화가가 상패와 꽃다발을 안고 있다. 그의 대형 회화 ‘할라잇’ 연작 20점이 서울 조선일보미술관에서 14일까지 전시된다. 모두 올해 완성한 작품이다. /남강호 기자

첫 기억이 물감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전쟁이 놀거리를 앗아갔다. 심심해도 할 게 없었다. 그저 대구역(驛) 앞을 어슬렁대며 행인들을 구경하는 게 일과였다. 여름 무렵이었을 것이다. 에어컨이 작동하는 미국공보원(USIS)을 기웃거리다가 그 안에 걸려있던 그림을 보게 됐다. 나중에서야 그게 이중섭의 전시였다는 걸 알게 됐다. 내 평생 처음 본 현대미술이었다.”

4일 서울 조선일보미술관에서 제33회 ‘이중섭미술상’ 시상식 겸 수상기념전이 열렸다. 수상자 곽훈(80)씨는 “이중섭 그림으로 미술을 접했는데 이제 ‘이중섭미술상’까지 받게 되니 신기하다”며 “상황이 아무리 비참해도 동심(童心) 어린 그림을 그려냈던 이중섭이 초인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곽씨는 1975년 미국으로 떠나 40년 가까이 현지에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한국을 떠나기 전 딱 하나 받은 상이 조선일보 주최 ‘현대작가 초대전’이었다. 칭찬받고 상금도 받은 유일한 기록이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 처음 받은 상이 ‘이중섭미술상’이다. 인연이 뜻깊다.”

축사는 불어(佛語)로 이뤄졌다. 곽훈의 작가론(論)을 집필 중인 올리비에 들라발라드(54) 프랑스 도멘 드 케르게넥미술관장은 “곽훈은 독자적인 화풍을 갖고 있는 드문 작가”라며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작업한 것이 그 까닭인 것 같다”고 말했다. 마침 다른 전시 준비로 방한한 올리비에는 이번 수상기념전 큐레이터를 맡았다. “동년배인 한국 단색화(單色畵) 작가군에 흡수되거나 동화될 수도 있었지만 타국에서 홀로 작업하며 비로소 자기 고유의 문명에 천착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원시적 고래 사냥의 순간을 그려낸 최근 연작(‘Halaayt·할라잇’)도 마찬가지다. 이 그림은 한 국가에 국한되지 않고 인류 전체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된다. 자연과 인간에 대한 상상력으로 회화 연구에 매진하는 화가에게 큰 박수를 보낸다.”

올해 반구대(盤龜臺) 암각화 발견 50주년을 맞아, 곽씨가 4년 전부터 발표하고 있는 ‘할라잇’ 연작도 덩달아 각광받고 있다. 북극의 사람들이 망망대해에서 살아남기 위해 거대한 고래를 향해 다가서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다음 달 프랑스 라로셸 자연사박물관에서 고래 관련 전시가 열리고, 이에 앞서 개최되는 학술대회에서 보르도 몽테뉴대학 최옥경 교수가 곽훈의 그림(현대미술)과 암각화(선사시대)를 연결짓는 기조발표를 진행키로 했다. 국제적 조명의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날 시상식에는 윤진섭 이중섭미술상 운영위원, 김이순·이선영 심사위원, 역대 이중섭미술상 수상 작가 황용엽·권순철·김경인·오원배·홍승혜·정경연·정복수·박영숙, 박명자 갤러리현대 회장, 김종규 한국박물관협회 명예회장, 원혜경 선화랑 대표, 이지원 피앤씨갤러리 대표, 신양섭 화가,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 홍준호 발행인, 김문순 조선일보 미디어연구소 이사장 등 각계 인사 100여 명이 참석했다. 수상기념전은 14일까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