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 조종석에 앉아 활짝 웃고 있는 자라 러더퍼드. 이번 세계일주 비행 중 기억에 남는 순간은 “아이슬란드에서 용암을 뿜어내는 화산 위를 지날 때 비행기가 흔들거렸던 일”이라고 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지난 8월 18일 벨기에 플랑드르주 코르트리크에서 초경량 비행기 ‘샤크 아에로’ 한 대가 날아올랐다. 파일럿은 얼굴에 아직 주근깨가 남아있는 열아홉 살 소녀 자라 러더퍼드(벨기에·영국 이중국적)였다. 최연소 여성 세계일주 기록을 세우기 위한 여정의 시작이었다. 북서쪽으로 향한 비행기는 영국과 그린란드를 지나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갔다. 이후 남쪽 카리브해를 따라 멕시코와 콜롬비아 등 중남미 국가들을 거친 뒤 캐나다 해안선을 따라 북상했다.

베링해협을 건넌 러더퍼드의 비행기는 11일 현재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다. 그의 다음 기착지는 서울이다. 당초 11일 오후 주한 벨기에 대사관 측의 환영 속에 김포공항에 도착할 예정이었지만, 현지 기상 사정 때문에 이르면 13일쯤 도착할 예정이다. 그리고 휴식을 취한 뒤 다음 날 바로 전남 무안을 이륙해 대만 타이베이로 향한다. 이후 동남아와 인도, 중동을 거쳐 지중해를 지나 최초 이륙했던 코르트리크로 돌아가는 여정이다.

5대륙 52국을 들러 고국 벨기에로 되돌아가는 여정 약 4만2000㎞의 절반 가까이를 소화했다. 코로나 대유행으로 하늘길이 거의 막힌 상황에서 10대 소녀의 도전에 전 세계가 주목했고, 외신들은 그의 비행 소식을 시시각각 전하고 있다.

자라 러더퍼드의 세계일주

러더퍼드는 군 헬기 조종사 출신인 아버지와 조종자 자격증을 가진 변호사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모험과 도전을 독려하는 자유로운 집안 분위기에서 우주 비행사라는 진로를 잡았다. 미국과 영국에서는 파일럿 자격증을 따고, 슬로바키아와 프랑스에서는 경비행기 운전면허를 취득하는 등 차근차근 커리어 쌓기에 나섰다. 우리나라로 치면 고3인 그가 세계일주에 나선 이유는 따로 있다. “또래 소녀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어서”다. 어린 시절부터 수학과 과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러더퍼드는 이 분야가 남성들의 독무대처럼 여겨지는 현실이 못마땅했다.

그는 세계 누리꾼들과 비행 현황을 실시간으로 공유하는 홈페이지에서 이런 심경을 진솔하게 피력했다. “동화책에서 멋지고 용감한 왕자는 위험과 난관을 뚫는 모험을 펼치지만, 아름다운 공주는 잠을 자며 왕자가 구해주기를 기다리죠. 현실에서도 남자아이들은 과학과 관련된 장난감을 선물받고, 용감해지라고 격려받아요. 그래서 과학자나 우주 비행사, 기업 경영자를 꿈꿔요. 반면 여자아이들한테는 인형을 선물해주고, 우아하고 매력 있고 아름다우라고 가르치죠. 이런 훈육 방식이 꿈을 정형화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러더퍼드는 “전 세계 민간 비행사의 5%만이 여성이고, 컴퓨터 과학자의 15%만이 여성”이라며 “내 또래의 소녀들과 젊은 여성들이 더 많이 STEM(과학·기술·공학·수학) 분야에 진출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현재 최연소 세계일주 비행사로 기네스북에 오른 남성은 18세의 나이로 지난 7월 세계를 완주한 영국의 트래비스 러들로다. 최연소 여성은 2017년 세계일주에 성공한 아프가니스탄계 미국인 샤에스타 와이즈(30)다.

남아있는 절반 정도의 여정을 다 소화하면 러더퍼드는 최연소 기록을 11년 앞당겨 신기록의 주인공이 된다.그는 최근 미국 CBS TV와의 인터뷰에서 1928년 여성 처음으로 대서양 횡단에 성공한 비행사 어밀리아 에어하트(1897~1937)와 첫 흑인 여성 비행사이자 최초로 비행 자격증을 획득한 아메리카 원주민 여성인 미국의 베시 콜먼(1892~1926)을 언급하며 “그들의 용기와 결단력을 존경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