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실에서 미소 짓고 있는 송창원 미국 미네소타대 명예교수. 6·25전쟁 당시 학도병과 육군 소위로 참전했던 그는 “생사를 넘나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며 자신의 90년 인생을 회고했다. /율리시즈

“생사의 분기점을 왔다 갔다 했던 전쟁터의 기억은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지요. 아직도 많은 일이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습니다.”

한국인 최초로 세계적 학술지 ‘네이처’에 논문을 게재한 미국 미네소타대 송창원(89) 명예교수. 그에겐 잊지 못할 젊은 시절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6·25전쟁에 학도병으로 참전하고 뒤늦게 대학교에 진학해 국비 장학생으로 미국에 가기까지, 그의 인생엔 한국 현대사의 굴곡이 녹아있다. 아흔이 가까워진 노(老)과학자가 이제야 시간을 내 자신의 삶을 돌아봤다. 회고록 ‘나는 6·25의 학도병, 그리고 과학자 송창원입니다’를 통해서다. 미국에 있는 그와 최근 서면으로 만났다. “늘 연구에 몰두하다 보니 따로 시간이 없었어요. 그런데 코로나로 학교가 폐쇄되면서 뜻하지 않게 시간이 좀 생겼지요. 회고록을 집필하며 인생을 돌아보게 됐습니다.”

1932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소학교에 입학해 조례 때마다 일본 천황에게 인사하는 것을 당연히 여겼다. 창씨개명으로 ‘야마우치 히로오’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다. “1945년 ‘일본제국의 신민’이었던 나는 미 군정청의 다스림을 받는 ‘점령지 조선의 소년’이었다가, 1948년 정부 수립 후 ‘대한민국의 국민’이 됐다. 북한군이 내려오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민’이 될까봐 숨어다녔고, 다시 ‘대한민국 국민’으로 회복됐다. 기구한 운명의 소년이었다.”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담담하게 풀어냈다. 6·25 때 인민 의용군 강제 소집을 피하기 위해 천장에 올라가서 잤던 일, 학도병에 자원입대해 함경도 원산까지 갔다가 ‘거지꼴’로 돌아왔던 일, 육군종합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나이를 세 살 올려 허위 신분증을 만들었던 일까지 모든 것이 그에겐 여전히 생생하다. “고성 전투 때 폭탄 파편이 척추 옆에 깊이 박혔어요. 70년 전 내 몸에 들어온 불청객이지요. 아직도 공항 보안검색대에 서면 파편이 나타나 검사관들이 몸을 뒤지곤 합니다.”

6·25전쟁 당시 학도병이었던 송창원 명예교수 사진.

부상을 입고 전역한 뒤엔 어릴 적부터 꿨던 과학자의 꿈을 이루기 위해 독학으로 대입을 준비했다. 서울대 문리대 화학과에 입학한 그는 1959년 제1차 국비 원자력 유학장학생에 선발돼 미국 아이오와대로 떠났다. 그는 “과학자가 되겠다는 뜻을 세우고 지금까지 일관되게 살아왔다”며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했다. “우수한 연구자가 되기 위해 매일 12시간 연구에 몰두했지요.” 피나는 노력 끝에 그의 논문이 1968년 네이처에 실렸다. 60여 년간 암의 방사선 치료 효과 증진을 위한 방사선생물학 연구에 매진하며 세계적 방사선생물학자가 됐다. 20명 넘는 한국의 방사선 종양학 전문의, 대학생들에게 유학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정부 장학금으로 유학 온 유학생 1호로서 빚을 갚는다는 마음”이었다고 했다.

10년 전 미네소타대에서 은퇴했지만 연구를 향한 그의 열정은 여전히 불타오른다. 지금까지 발표한 논문이 300여 편에 달한다. 온라인으로 학회 초청 강연도 계속하고 있다. “연구에는 끝이 없습니다. 지금도 한두 가지 꼭 규명하고 싶은 게 남아있어요. 한국의 후학들하고 공동 연구도 계속하고 싶어요.”

“미국 시민권을 갖고 있지만,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잊은 때는 단 한 번도 없다”고 했다. 노교수는 자신의 이야기가 후학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회고록을 썼다고 했다. “인생을 멀리 보고, 꿈을 품고, 현재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면 노력의 결실이 이루어진다고 믿습니다.” 후학들에게도 당부의 말을 남겼다. “과학자란 사적 이득을 추구하기보다는 인류를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고자 하는 소명을 가져야 합니다. 많은 과학자의 헌신으로 과학과 문명이 발전해왔다고 믿습니다.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를 기쁘게 감당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