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사도(佐渡)광산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싶다면 먼저 역사 앞에 솔직해야 합니다. 광산 가장 깊은 갱도에서 비참하게 일한 조선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주길 바랍니다.”
일본이 조선인 노동자 강제 동원 현장인 니가타(新潟)현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자, 사도광산 강제 동원 피해자 고(故) 임태호씨의 딸 임간란(82)·임경숙(77)씨가 반대 목소리를 냈다. 지난 17일 가나가와(神奈川)현 가와사키(川崎)시에서 만난 두 사람은 “사도광산의 가치를 무조건 부정하는 게 아니라, 자랑할만한 역사만 내세우고 부끄러운 내용은 감추고 왜곡하는 일본의 태도를 문제 삼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임태호씨는 사망 넉 달 전이던 1997년 5월 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 기록 사업에 참가해 강제 동원 피해 사실을 구술한 유일한 사도광산 생존 피해자다. 21세이던 1940년 11월 충남 논산에서 일본 사도광산으로 건너갔다가, 해방 직전 일본군 소집 영장을 받고 홀로 사도섬을 탈출해 나중에 가족과 상봉했다. 그는 사도섬에 도착한 뒤에야 ‘강제 동원’이라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탄광 가장 깊은 갱도에서 위험한 광석 채굴을 해야 했고, 지하 갱도로 출근할 때마다 “오늘은 살아 나갈 수 있을까” 생각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임씨의 장녀 간란씨는 1940년 논산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따라 사도섬으로 건너갔다. 그는 “어린 나이였지만 사도섬 숙소에 앉아있으면 멀리서 ‘쿵’ ‘쿵’ 하고 갱도가 폭발하는 소리가 늘 울리던 기억이 생생하다”며 “부상을 입은 아버지가 병원도 못 가고 방에 끙끙대며 누워만 있던 모습도 생각난다”고 했다. 사도 아이카와(相川) 외딴 산 높은 곳엔 주로 충남 일대에서 동원된 조선인들이 모여 사는 사택이 있었다. 조선인들의 도망을 막기 위해 가족들도 단체로 이주시켰다고 한다.
사도섬에서 태어난 셋째 딸 경숙씨 역시 “아버지가 갱도 안 발판에서 떨어져 다리가 찢어졌는데 그 흉터가 죽기 전까지 없어지지 않았다”며 “그때 갱도에서 마신 탄광 먼지 때문에 아버지 폐 속엔 평생 구슬 같은 덩어리가 남아있었다”고 했다. 간란씨는 “돈을 많이 주겠다며 조선 청년들을 모집했지만 모두 거짓말이었고 뜻대로 그만둘 수도 없었다”며 “사도섬을 탈출한 뒤엔 돈이 없어 가와사키시의 마구간에서 부모님과 어린 딸 셋이 살았다”고 하기도 했다. 이후 임씨 부부는 과일·막걸리 행상, 고물상으로 닥치는 대로 일하며 6남매를 길러냈다. 1980년대 어머니와 함께 사도섬을 다시 찾았지만, 50년이 지난 뒤에도 어머니의 상처는 여전했다. “고생하던 아버지 모습이 떠올라 괴롭고, 다신 오고 싶지 않다”고 했다.
임씨 남매들은 지난해 말 TV 뉴스를 보고서야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 움직임을 알게 됐다. 사도의 기억을 여전히 상처로 간직한 이들은 일본이 ‘에도 시대 사도광산’으로 시기를 한정해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시도하는 데 분노했다. “무조건 반대하는 게 아니에요. 사도광산의 역사적 가치를 세계에서 인정받고 싶다면, 조선 사람들이 그때 사도섬에 왜 들어갔고, 어떻게 일하고 생활했는지, 부끄러운 역사조차 인정하고 공개하는 데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