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숙자 한국전통음식연구소 대표가 경기 연천군 개성식문화연구원에서 개성 음식 ‘가지쟁김치’를 들고 있다. 가지 안에 김칫소를 넣어 장아찌처럼 절인 음식이다. 윤 대표는 “개성의 여름 별미”라고 했다. /김영준 기자

북한과 인접한 경기도 연천의 조용한 시골 마을. 요리 전문가 윤숙자(74) 한국전통음식연구소 대표가 텃밭에 있는 채소 잎을 따 먹어보라고 권했다. 쌉싸름한 맛일 줄 알았는데 상큼함이 입안 가득 퍼졌다. “이게 박완서 선생의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 나오는 싱아라는 채소예요. 북한 개성에서 많이 자라는 작물입니다.”

300평 정도 되는 텃밭에는 개성 특산품인 싱아와 인삼을 비롯해 상추·가지·토마토·고수와 식용 꽃 등 여러 채소가 자라고 있었고, 마당 한편에는 개성에서 많이 먹는다는 사과나 율무를 넣은 고추장과 된장, 두부장 등 30여 가지 장(醬)을 담근 장독들이 있었다. 개성과 20km 정도 떨어진 이곳에 오는 8일 ‘개성식(食)문화연구원’이 정식으로 문을 연다. 누구나 개성 음식을 맛보고 배울 수 있는 공간이다.

개성은 윤 대표의 고향이다. 윤 대표는 개성에서 태어나 세 살 때 6·25전쟁을 피해 가족들과 남쪽으로 피란 왔다. 어릴 때 고향을 떠나 개성에 대한 기억이 크게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대대로 전해져온 ‘고향의 맛’은 잊을 수 없다. “어머니가 매일 해주시던 음식이 개성 음식인데, 젊을 땐 그게 고향의 맛인 줄도 모르고 먹었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니 그 맛이 사무치게 그립더라고요.”

그때부터 실향민들을 찾아다니며 음식을 배웠다. “개성 출신 1세대 요리 연구가 고(故) 왕준련씨를 비롯해 이북5도청(황해도·평안남도·평안북도·함경남도·함경북도) 개성시민회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음식을 배웠어요. 온갖 논문과 자료를 뒤져가며 엄마 요리를 흉내냈죠”. 그러다 2018년 직접 작물을 재배하며 심도 있는 연구를 하고 싶어 고향 가까운 이곳에 터를 마련했다. 윤 대표는 “근처 산에 올라가면 맑은 날씨엔 육안으로 개성 시내가 보일 정도로 가깝다”며 “개성과 같은 토양, 같은 기후를 지닌 이곳에서 작물을 키우며 음식을 연구하는 게 의미가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윤 대표는 50년 음식 연구 경력을 토대로 2016년 한식재단 이사장, 평창 동계 올림픽 식음료전문위원을 지냈다.

윤 대표는 “모든 음식이 그렇듯 개성 음식에는 개성의 역사가 담겨 있다”고 했다. “고려 시대 도읍이었던 개성은 음식이 맵거나 짜지 않고 균형이 잡혀있어요. 소금과 간장뿐만 아니라 새우젓과 조기젓 등 다양한 재료로 간을 맞추지만 과하지 않죠”. 조선 시대에는 개성을 중심으로 활동한 송상(松商)들이 막대한 부(富)를 이뤘다. 이 때문에 개성 음식에는 인삼·전복·소고기 등 고급 식재료가 많이 쓰인다고 했다.

윤 대표는 오는 8일 개원식에서 이북5도청과 개성시민회 관계자들, 탈북민·실향민들을 초대해 음식을 대접한다. 그는 “역사가 담긴 고향의 음식이 명맥이 끊길 위기에 놓여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전통 요리법을 계승하고 있는 개성 출신 실향민들이 대부분 고령이기 때문이다. “이미 병상에 누워 거동을 못 하시는 분도 많아요. 이분들이 돌아가시고 나면 개성에서 나고 자라 그곳 음식을 직접 만든 경험을 한 분들이 남한 땅에서 사라지는 거죠. 저의 개성 음식 연구는 아직 진행 중입니다. 그분들께 제대로 된 개성 음식의 원형을 더 전수받아 보존하고, 이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물려주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