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장관→대학총장→언론사 대표→민간 위원장 및 이사장 등. 김진현(金鎭炫·87) 전 과학기술처 장관이 사회에서 맡은 직책들이다. 그는 54세이던 1990년 11월 동아일보 논설주간을 끝으로 언론계를 떠났다.
이후 지금까지 32년동안 13권의 저서(영문 및 공저 포함)와 150여편의 영어·일본어 논문을 냈다. 이는 보통 사람은 엄두도 못내는 열정과 필력 그리고 왕성한 독서의 산물이다.
◇평생 화두는 ‘대한민국 선진화’
그는 대한민국 최초의 비(非)과학자 출신 과기처 장관과 최초의 언론인 출신 종합대학(서울시립대학교) 총장 기록을 갖고 있다. 민간 경제연구소인 한국경제연구원을 비롯해 국제무역연구원, 한국해양수산개발원 등을 세운 주역이기도 하다.
“기자(記者)로서, 칼럼니스트로서 시절이 삶의 황금시대였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그는 다면적(多面的) 인생을 살면서 불변(不變)의 화두를 붙잡고 있다. ‘대한민국의 선진화와 한국민의 행복’이다. 1977년 그가 쓴 첫 책 <한국주식회사>를 필두로 한 저서 목록이 이를 증명한다.
<한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1988년), <한국은 어떻게 가야 하는가:국격·국력…선진화를 위한 제2독립운동>(1993년), <대한민국 어디로 가야 하나>(2004년), <대한민국의 미래와 거버넌스>(2014년), <김진현 회고-대한민국 성찰의 기록>(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과 미·중(美中) 전략 경쟁 격화 등으로 ‘역사의 전환점(Zeitenwende)’으로 불린 2022년을 마감하고 새해를 맞은 지금, ‘대한민국호(號)’는 어디를 향해 어떻게 가야 할까? 기자는 김진현 전 장관을 지난달 29일 서울 강남구에 있는 그의 개인 연구실에서 만났다.
◇근대화 성공과 도착적 근대화의 二重 절정
- 대한민국이 처한 현재 주소를 진단한다면?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1953년 휴전협정까지 ‘77년의 절대 비극 상황’과 1953년부터 오늘까지 ‘70년 평화’를 통해 한국은 경제·정치·문화 선진화라는 성공의 정점에 도달했다. 산업화와 학생시민 혁명에 의한 민주화, K-pop 한류 같은 문화선진화로 ‘완전선진국’ 가까이 됐다. 동시에 그 정반대인 역(逆)성공, 역성장, 도착(倒錯)적 근대화도 절정을 이루고 있다.”
- ‘도착적 근대화’의 절정(絶頂)은 무엇을 뜻하나?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산률, 세계 최고의 낙태율 및 성형수술율, 고소고발 무고(誣告)건수, 고아 수출 세계 2~3위, 돈 중심의 가족 이기주의, 세계에서 비슷한 사례 없는 이념·계층·노사·교육·지역·세대·젠더 등 7대 갈등 등이 그렇다.”
- 한국에 왜 이런 현상이 굳어지고 있나?
“우리나라 근대화가 특출한 초(超)고속 압축성장으로 이뤄지면서 단절과 양극화가 극성스럽게 전개된 탓이다. 우리의 도착적 사례는 근대화와 현대화의 본향(本鄕)인 서양은 물론 같은 문화권인 중국·일본·베트남·북한에서 볼 수도, 비교할 수도 없는 극단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김 전 장관의 이어지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 도착적 근대화 현상을 ‘실패’라고 단정하지 않는다. 오늘의 주역들이 두 개의 절정을 냉철하게 정리·수렴·승화한다면, 우리나라가 문명사적 위기와 대전환기 지구촌 인류의 새 길을 개척하는 새 문명의 선구자가 될 수 있다.”
- 그러나 지금 당장 한국은 북한 핵 위협과 인구 급감으로 존망 자체가 위협받고 있다.
“맞는 말이다. 북한의 핵과 ICBM(대륙간탄도미사일) 완성 단계 돌입으로 한국의 안보 조건은 6.25 전쟁 이후 가장 위험하다. 세계 3위인 한국의 플라스틱 쓰레기 배출량과 급속한 국토의 아열대화 같은 환경문제도 심각하다. 한국은 지구 온난화 대비에 관한 한 ‘불량 국가’ 수준이다. 미·중 전략 경쟁 격화로 세계화와 무역으로 발전해 온 한국에 매우 불리한 환경이 펼쳐지고 있다.”
◇두 갈래 길 분기점에 선 대한민국호
그는 “인류가 직면한 세계적 위기 해결의 선구자가 되는 길과, 역(逆)발전·반(反)근대화·도착 현상의 증폭으로 국가가 해체 또는 소멸하는 패배자의 길이라는 분기점(分岐點)에 지금 대한민국이 서 있다”고 말했다.
- 우리가 첫 번째 길을 갈 가능성은?
“안타깝지만 현재로선 그리 높지 않다. 보수·진보를 떠나 역대 정권들이 ‘자강(自强)’이라는 국가목표를 망각하고 약화시켰기 때문이다. 이로인해 국민들의 국가의식·자강의식까지 희박하고 왜곡됐다. 30년에 걸친 북핵 대응 실패, 중심 없는 대중·대일 외교, 만화 같은 문재인-김정은 외교가 생생한 증거이다.”
그는 “북한 핵(核) 실험으로 미국 호놀룰루와 일본 도쿄가 방공 대피 훈련을 했는데, 직접 최대 피해 대상국인 한국의 주무 책임자인 김부겸 행자부 장관은 2017년 12월 ‘정부가 나서면 위험을 조장하는 오해나 불안감이 있을 수 있다’고 했다. ‘자강’을 잊어버린 한국 지도층의 인식과 수준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했다.
-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산업이 선진화하면 국가도 절로 선진화된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대한민국의 생존 명제는 자강’이라는 근원과 기본으로 돌아가 자립(自立)·자강(自强)·자성(自成)을 국가 목표로 삼아야 한다. 박정희 대통령 이후 이런 국가 목표를 내걸고 추진한 대통령은 한 명도 없었다. 이들은 이승만(李承晩)과 박정희 두 분의 대통령이 만들어 놓은 언덕에 기대 ‘낭만적인 대북 평화’ 접근과 ‘미국 의존증(依存症)’에 빠져 왔다.”
◇“낭만적 대북 접근과 미국 의존증 빠진 대통령들”
- 30여년 전 칼럼에서 한국민에게 ‘1당(當)36 정신’을 역설했다. 선진국이 된 한국은 여유 가져도 될까?
“그렇지 않다. 한국이 세계 4대 강국에 둘러싸인 유일한 나라라는 사실은 불변의 진리이다. 주변에 강대국이 많다는 스위스만 해도 핵을 보유한 나라는 프랑스 뿐이다. 한국민은 지금도 네 나라 인구, 즉 40배의 인구와 더불어 살고 경쟁한다는 철칙(鐵則)을 잊어선 안 된다. ‘1당 40’을 목표로 삼고 힘을 키워야 한다.”
그는 “그래야 인구와 자원 조건에서 절대 불리하고 역사·지정학적 조건이 숙명적으로 극열(極熱)한 대한민국이 살아남고 이겨낼 수 있다. 이것이 자강(自强)이란 목표의 핵심”이라고 했다.
◇“안중근 의사와 같은 義氣·애국심 충만해야”
- 여전히 강대한 미국, 중국, 일본을 우리는 어떻게 상대해야 하나?
“우리나라에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친미(親美), 친중(親中), 친일(親日) 친로(親露·친러시아)파가 있어야 한다. 친(親)인도, 친몽골, 친베트남, 친중앙아시아 인맥도 필요하다. 중국 인접국과 긴밀해지면 대중(對中) 관계에서 우리가 지렛대를 가질 수 있어서다. 다만, 특정국가와 밀착하더라도 개인과 가족의 잇속을 챙기는 사리사욕(私利私慾)에 사로잡힌 사람이어선 곤란하다. 안중근 의사와 같은 의기(義氣)와 애국심으로 충만해야 한다.”
- 현실에서 그렇게 행동한 전례(前例)가 있나?
“일본이 그러하다. ‘공인정신’에 투철한 일본의 리더 가운데는 지독한 친중파 또는 친러파가 제법 많았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같이 일본의 국가이익을 최우선했다. 그런 점에서 일본 리더들은 한국보다 몇 수 위였다. 구한말 조선의 친중·친러·친일 지도자들은 개인 및 가문을 국가 보다 더 중시했다. 그 결과 우리는 국권(國權)을 잃은 망국 백성이 됐다.”
- 지난달 발간한 <한국의 새 길을 찾다>에서 ‘한국은 더 이상 미국, 중국, 유럽, 일본 배우기를 우선하지 말자’고 했는데.
“대한민국이 당면한 문제군(問題群)이 워낙 격렬하고 세계 초유(初有)인 까닭이다. 노동조합, 대기업 지배구조, 북핵 위협, 정치의 ‘두 나라 분열 현상’은 한국에만 있는 특수하고 최첨단적인 현상이다. 선진국에서도, 제3세계에서도 우리가 더 이상 배울 모델이 없다. 국민과 지도자, 엘리트, 국가공동체가 ‘우리’ 그리고 ‘이 땅’에서의 문제해결에 지극한 간절함과 정성으로 진력(盡力)해야 한다.”
그러면서 그는 인구 급감 사례를 들었다.
“2022년 10월 한달 동안 우리나라 신생 출생자는 2만 736명이고, 같은 해 1~10월 합계 출생자는 22만 4216명이다. 2022년 전체로는 25만명에 불과하다. 이 숫자가 앞으로 유지되고, 이들이 모두 생존한다고 해도 30년간 750만명에 불과하다. 1960년 6명, 1970년 4.53명이던 우리나라 합계출산율이 1983년 2.06명, 2022년 2분기 0.75명으로 급락했다. 인구가 이렇게 줄면, 삼성전자도 인력 부족으로 유지를 못한다. 인구 문제 해결을 지금 시도해도 결과는 20~30년 후 나온다. 여간 심각한 일이 아니다.”
- 이런 위기를 한국민이 극복하고 해결할 수 있을까?
“한국민은 불교·유교·기독교라는 세계 3대 종교를 섭렵하고 완벽하게 소화한 유일한 민족이다. 우리가 뜻을 세우고 제대로 노력한다면 새로운 가치와 해법 발견이 가능할 것이다. 여기서 새 길을 찾는 것이 한국인에게 부여된 천명(天命)일 수 있다.”
◇“MZ세대에 희망·기회 주는 ‘진짜 정치’ 절실”
- 그것 만으로 충분할까?
“흥망성쇠의 시발점이자 출발점인 정치(政治)가 달라져야 한다. 새로운 정치, 즉 K-정치가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드는 첫걸음이다. 국민들에게 ‘이게 내 나라이고 내가 헌신·희생해야 한다’는 자발성을 촉발하는 본원적 정치를 회복해야 한다.”
김 전 장관은 이어서 말했다.
“낙망과 절망을 호소하는 미래세대·MZ세대에 희망과 기회를 줄 수 있는 정치가 절실하다. 정치인이 외교안보·경제·과학기술·교육·노사·사회구조에 대한 최소한의 기본 지식과 소양을 갖추고 국가 기능을 종합조정하는 ‘진짜 정치’가 필요하다.”
- 그런 점에서 2023년이 중요한 해인 듯 하다.
“그렇다. 새해라는 전환점을 넘어 한국 정치의 최대 주역인 윤석열 대통령이 본론을, 본실력을 보여야 할 때이다. 노조, 교육, 연금 개혁, 대북 관계, 경제 등에서 2022년은 워밍업(warming up·몸 풀기) 시기였다. 윤 대통령의 언어(言語)는 때때로 훌륭했으나, 실체와 세력 구축에서 국민들에게 안심을 주진 못하고 있다. 2023년에 성공해야 4년 후인 2027년에 닥쳐올 복합위기를 이겨낼 수 있다.”
- 왜 꼭 2027년인가?
“2027년은 한국 대통령 선거와 중국의 시진핑 4연임 여부가 판가름나고, 중국인민해방군 창군 100주년이 되는 해다. 대만 통일을 못 하면 시진핑은 정치적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 2027년은 대만 침공과 한반도 전쟁이 동시에 벌어질 수 있는 중요한 해이다. 윤 대통령이 리더십 확보에 성공하지 못하면, 북한 김정은은 굳이 핵을 쓰지 않고도 정치 공작만으로 2027년 대선에서 대한민국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확신할 것이다”
그는 “그런 점에서 2023년은 2024년 총선은 물론 2027년 대한민국과 세계의 명운(命運)을 좌우하는 원년(元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비정치인 출신 민간 대통령...자질 충분해”
- 윤석열 대통령은 어떻게 해야 할까?
“멸사봉공(滅私奉公), 즉 사(私)를 없애고 헌신하는 자세를 더 확실하게 해야 한다. 2022년 윤 대통령에게선 틈틈이 사인(私人)의 냄새가 났다. 확연히 이걸 뛰어넘어야 한다. ‘윤 대통령은 다르다. 사심 없이 불철주야(不撤晝夜) 국민 위해 정성 다하는 그를 도와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퍼질 정도가 돼야 한다. 역대 대통령 중에는 이승만과 박정희(朴正熙)를, 역사인물 가운데는 안중근 의사(義士)를 모델로 삼아 ‘국민 감동 정치’를 펼쳐야 한다. 이것이 윤 대통령의 승부수가 될 수 있다.”
김 전 장관은 이렇게 말했다.
“국내외적으로 큰 위기이며 잘못하면 망할 수 있다는 걸 우리 국민들도 잘 알고 있다. 많은 국민들은 협조하고 이해할 준비가 돼 있다. 윤 대통령은 대한민국 헌정사를 통틀어 민간인 대통령 가운데 유일한 비(非)정치인 출신이다. 그에게는 잘 할 수 있는 자질이 충분하다.”
- ‘1930년대 생’ 세대가 대한민국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1930년대생들은 세계와 한반도 인구가 각 4배 넘게 증가한 걸 목도했다.(※세계 인구는 15억명에서 80억명, 한반도 인구는 1500만에서 8000만명으로) 우리는 대륙과 해양문명, 망국과 전쟁, 혁명도 겪었다. 스마트폰, 인공지능(AI) 같은 새로운 경지까지 체험하는, 한국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다생(多生) 세대이다.”
◇“성공·실패 맛본 세대, 대참회·반성 운동을”
그는 “1930~40년대생도 많이 고생했지만 우리의 청년 후대(後代)들은 그 이상으로 지구적, 문명사적 불행을 겪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런 불행을 줄일 수 있도록 봉사하고 헌신하는 방법을 고민해 실천했으면 한다”고 했다.
- 어떤 게 가능할까?
“대한민국 근대화·선진화 과정에서 좌우(左右) 어느 쪽에 있었든, 정치·기업·노동·언론·문화 등 각 분야의 주류(主流)로 활동했던 인사들이 ‘진실된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나’를 뛰어넘는 참회와 반성운동을 제안하고 싶다. 이런 움직임이 불붙어 ‘시민원로(元老)회의’ 같은 것으로 발전하면, 증오와 분노·분열의 정치를 극복하고 정치 선진화를 이끌어내는 작은 불빛이 될 수 있다.”
김 전 장관은 “우리나라의 많은 80~90대가 한국 정치의 처참한 수준과 후진성을 밤잠 못 이루며 걱정하고 있다”며 “안타까워만 할 게 아니라 회고록 또는 반성 같은 방식으로라도 자기 분야에서 진정성 있는 해법과 대안을 내놓았으면 한다”고 했다.
- 국가 원로로서 국민께 한 말씀하신다면?
“대한민국에서 시민 또는 기능인으로서 산다는 것은 한국 민족사와 인류적 삶을 동시에 사는 이중적(二重的) 의미가 있다. 우리는 한국이 못 다한 미완(未完)의 과제 완성과 첨예한 인류문제 해결이라는 두 개의 사명(使命)을 짊어지고 있다. 노력 여하에 따라 우리가 인류 문명의 새로운 장(章)을 여는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음을 가슴에 새기고 행동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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