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7일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 연차총회에 100세의 노(老)학자가 화상(畫像) 강연자로 나왔습니다. 미국의 외교 천재(天才)이자 대부(代父)로 불리는 헨리 키신저(Henry Alfred Kissinger) 박사였습니다. 이날 그의 말입니다.

헨리 키신저 박사의 최근 모습

“전에 나는 우크라이나의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을 반대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전쟁이 상당한 수준에 이른 지금, 우크라이나의 중립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이는 작년 5월 23일 다보스포럼에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미국 등 서방의 개입을 중단하고 러시아를 미국 편이 되게 해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뒤집은 것입니다. 그의 발언이 나올 때마다, 국내외 반응은 극명하게 갈립니다. “중국·소련에 겁먹은 유화주의자”, “최고의 현실주의 학자” 같은 식입니다.

◇8년간 美 외교 지휘...TIME 표지에 21번 등장

1923년 독일 바이에른주(州) 뉘른베르크 인근 퓌르트(Fürth)에서 태어난 그는 46세에 리처드 닉슨 행정부의 국가안보보좌관(우리나라의 국가안보실장)에 발탁됐습니다. 연이은 제럴드 포드 행정부에선 국무장관으로 임기 말까지 재임해 1969년부터 8년간 미국 외교의 총설계자이자 집행자였습니다.

1969년 2월 14일자 타임(TIME)지 커버스토리에 등장한 헨리 키신저 박사. 리처드 닉슨 행정부의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임명된 직후이다./인터넷 캡처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지(誌) 표지 인물로 모두 21차례 등장한 그는 1973년 노벨평화상을 받았고 현재 미국 역대 행정부 각료 가운데 최고령 생존자입니다. 미국 윌리엄앤메어리 대학이 2014년에 정치학자 161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지난 50년 최고의 미국 국무장관’ 조사에서 키신저는 압도적 1위에 뽑혔습니다.

1982년과 2014년, 심장 관상동맥과 대동맥판막 수술을 각각 받았으나 그의 집중력과 총기(聰氣·총명한 기운)는 여전합니다. 92세의 노구(老軀)를 이끌고 2015년 3월 리콴유 싱가포르 총리 장례식에 직접 참석한 키신저는 99세인 지난해 600쪽 넘는 분량의 책을 냈고 요즘도 각종 인터뷰와 강연에 응하고 있습니다.

그의 전기(傳記)와 행적을 다룬 책만 이미 줄잡아 100여종 넘을 만큼, 키신저는 세계적인 논쟁과 관심 대상입니다. 올해 5월 말 100세 생일을 맞는 그의 진면목은 어떨까요?

헨리 키신저 박사가 2021년에 낸 <인공지능의 시대>(왼쪽)와 2022년에 발간한 <리더십>
2022년 4월 <리더십>을 출간한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미국 ABC방송의 '굿모닝 아메리카(GMA)'에 나와 조지 스테파노풀러스 앵커와 대담하고 있다./유튜브 캡처

◇①국무장관 된 ‘공부벌레’ 이민자

먼저 그는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을 성취한 전형적인 흙수저 출신입니다. 독일계 유대인 집안의 2남 중 장남(長男)으로 15세 때인 1938년, 나찌(Nazi)의 박해를 피해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왔습니다. 이민자가 당대(當代)에 미국 국가권력 서열 4위의 국무장관이 된 것은 키신저가 처음입니다.

그는 독일 시절에는 축구를 좋아하고, 중상(中上) 정도 성적의 평범한 학생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찌 집권후 히틀러 청년 조직과 보안대로부터 주기적으로 폭행과 괴롭힘을 당하면서 달라졌습니다. 특히 가족과 함께 뉴욕에 정착해 낮에는 면도용 솔(brush) 공장에서 일하고 야간(夜間) 과정으로 고교와 뉴욕시립대 1년을 다닌 게 전환점이 됐습니다.

거의 모든 과목에서 A학점을 받은 키신저는 2차 세계대전 참전 중에도 “책을 씹어 먹는다”고 할 만큼 공부벌레로 변했습니다. 1945년 독일의 항복 후, 하이델베르그 부근 벤샤임(Bensheim)이란 작은 마을을 그가 부사관 신분으로 직접 다스린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인생 경험’입니다.

키신저 전기(傳記)를 쓴 월터 아이잭슨은 “10대에 힘 없는 유대인으로 숱한 박해를 겪고 20대 초반엔 생살여탈(生殺與奪)권을 휘두른 키신저는 누구보다 ‘권력 지향적’이고 현실주의 정치관을 갖게 됐다”고 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 군인 시절의 헨리 키신저(사진 왼쪽) 모습/페이스북 캡처

◇②‘권력 지향’ 폴리페서의 원조

귀향 장병 지원법(The GI Bill)의 수혜자로 1947년 하버드대 정치학과에 입학한 키신저는 대학원생 때부터 백악관, 국무부, FBI(연방수사국) 등의 비상근 컨설턴트로 일했습니다. 여름방학 8주동안 유럽·아시아의 유망 청년들을 모아 진행한 ‘하버드 국제 세미나’와 미국외교협회(CFR)의 핵무기 스터디그룹 책임자도 맡았습니다.

연구실과 강의실만 오가는 상아탑 학자가 아니라 현실 정치와 정책 참여를 선호하는 편이었죠. 이런 ‘권력 밀착(密着)’ 행보는 하버드대의 기존 교수들이 가난한 유대인인 키신저를 따돌린 탓이 있었지만 ‘권력’의 쓴맛과 단맛을 모두 체험한 무명(無名)의 청년 학자로서 생존을 위한 본능(本能)적 발동이기도 했습니다.

하버드대 전경/위키피디아

1958년 하버드대 교수가 된 키신저는 ‘석유왕’ 존 록펠러의 손자(孫子)인 넬슨 록펠러의 비공식 참모가 돼 ‘폴리페서(polifessor·정치 지향적 교수)’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는 1960·64·68년 세 차례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한 록펠러의 외교안보 자문 겸 연설문 작성자였습니다.

니얼 퍼거슨 스탠포드대 후버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절부터 권력 언저리에 활동하던 키신저는 학자라는 외부인의 한계를 절감하고 워싱턴의 내부자가 되길 갈망했다. 유복한 가정 출신이 아닌 그는 투쟁을 해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 보다 잘 알았다”고 지적했습니다.

한때 회계사를 꿈꾸던 키신저는 1969년 2월 백악관의 외교 총사령탑에 올랐습니다. 주류(主流) 엘리트인 와스프(WASP·백인앵글로색슨개신교)는커녕 인맥과 재력 모두 거의 없었던 키신저에게 독일 및 이민·군 복무→하버드대학 시절을 거쳐 3번째 인생 막(幕)이 오른 것입니다.

1972년 당시 리처드 닉슨 대통령(왼쪽)과 헨리 키신저 국가안보보좌관 모습

◇③압도적인 知的 자신감

미국 행정부 역사상 닉슨과 키신저는 명민(明敏)함을 이룬 ‘황금의 콤비’로 평가됩니다. ‘정적(政敵)의 책사(策士)’이던 키신저를 닉슨이 임명한 것은 의외(意外)였지만, 두 사람은 동부 엘리트 출신이 아니며, 역경을 이겨 왔고, 원하는 바는 반드시 쟁취한다는 공통점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키신저가 ‘슈퍼(super) K’ 또는 ‘슈퍼 세크리터리(Secretary·장관)라는 애칭을 들을 정도로 성공한 밑바탕에는 강한 지적(知的)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하버드대 시절 옷차림·스포츠·여학생에 관심없고 독서와 글쓰기의 황홀함에 푹 빠진 그는 캠퍼스에서 은둔자로 통했습니다.

최우등(summa cum laude)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하면서 그는 독일 역사철학자인 칸트·슈펭글러와 영국 역사학자 토인비를 다룬 388쪽짜리 긴 논문을 냈습니다. 하버드대는 이후 학부생 졸업 논문 분량을 ‘총 3만5000단어 또는 140쪽’으로 제한했습니다.

탄탄한 유럽 근대 문학·역사·철학 지식과 공부를 바탕으로 핵무기 같은 20세기 특성 연구와 풍부한 정부 프로젝트 수행 경력을 접목한 키신저의 실력은 단연 군계일학(群鷄一鶴·닭들 가운데 학 한마리)이었습니다. 그는 미국 정치학계의 유행이던 행태주의(behavioralism) 접근을 거부했습니다. 1954년 그의 박사학위 논문은 나폴레옹 전쟁 직후 유럽의 평화·안정을 낳은 1815년 비엔나 체제의 세력 균형(balance of power) 원리와 통치술을 집중연구한 것이었습니다.

키신저는 이렇게 형성한 역사적 안목과 유추로 세계 정치의 판을 혁명적으로 바꾸었습니다. 1971년 역사적인 두 차례 중공(中共) 방문과 이듬해 닉슨·마오쩌둥 정상회담 및 상하이 코뮤니케, 베트남 전쟁 종식을 위한 파리평화 회담, 소련과의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협상으로 20년 넘은 냉전 체제를 해체한 것입니다.

1973년 베이징 -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왼쪽)이 1973년 중국 베이징(北京)을 방문해 마오쩌둥(毛澤東) 중국 국가주석(오른쪽), 저우언라이(周恩걐) 총리와 함께 미·중 수교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양국은 1979년 수교했다.

◇④철저한 강대국 입장...약소국은 외면

현실주의(Realpolitik) 신봉자인 키신저에게 국제정치의 본질은 철저하게 ‘강대국 게임’이며, 약소국의 운명은 관심 밖입니다. 그가 지난해 다보스포럼에서 “서방은 우크라이나 영토 일부를 할양해서라도 러시아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라”고 말한 것도 이런 관점에서의 논리적 귀결입니다.

“400년간 유럽의 일부였고 유럽 내 ‘세력 균형’의 한 축(軸)인 러시아가 중국과 항구적 동맹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게 우크라이나의 생존보다 서방 이익에 더 합치한다”는 것입니다.

키신저가 2017년 8월 월스트리트저널(WSJ) 기고문을 통해 ‘한반도 빅딜론’을 내놓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아이디어는 북한 핵 문제 해결을 위해 미국과 중국이 ‘북한 정권 붕괴와 주한미군 철수’를 맞바꾸는 빅딜(큰 거래)를 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한국의 생존과 운명은 안중(眼中)에 없고 중국의 아시아 영향력을 인정하는 대신 중국을 앞세워 북핵 문제를 해결하자는 지극히 미국 중심적 발상입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17년 10월10일 워싱턴 백악관에서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과 대화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해 11월 초 한 중 일 등 아시아 순방을 앞두고 키신저 전 장관에게 북핵 문제 등에 대한 조언을 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키신저 전 장관은 중국의 아시아 영향력을 인정하는 대신 중국을 앞세워 북핵 문제를 해결하자는 이른바 '빅딜론'을 주장했다/scripps news 캡쳐

그는 공직 재임 중 칠레의 피노체트 반공(反共) 군사 독재 정권과 파키스탄 군사 정권을 지원했고 인도차이나에서 캄보디아 폭격으로 수 만명의 민간인 희생자를 냈습니다. 1973년 파리평화 협정 2년 만에 베트남이 공산화되고, 미·중 화해로 대만이 국제연합(UN)에서 쫓겨나도 흔들리거나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협상으로 얻은 평화가 성급한 베트남 포기나 기약 없는 전쟁 보다 좋다”는 식으로 키신저가 ‘차악(次惡·lesser evil) 선택’의 타당성을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연장선상에서 키신저의 20세기 외교가 한국에 시사하는 점에 대해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정치외교학)는 이렇게 진단했습니다.

“키신저에 의하면 21세기의 아시아는 19세기 유럽과 같은 힘의 균형 체제가 될 것이다. 그런데 한반도가 미국 국익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존재로 여겨질 경우, 미국은 한반도 문제에 개입하지 않을 수 있다. 한국 외교에서 최악(最惡)의 사태는 미국이 한반도에서 스스로 떠나는 일이다.”

강성학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가 2022년 출간한 <헨리 키신저>. 총 800쪽 넘는 분량이다./뉴스1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지 1974년 4월 1일자 커버스토리에 등장한 키신저. '위대한 키신저, 그는 어떻게 하고 있나?'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인터넷 캡처

◇⑤美 국민과 세계의 스승

키신저는 미국 최고의 외교 전략가라는 찬사와 더불어 개인적 이해 관계를 정책 결정과 자문에 반영해 사익(私益)을 챙겼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1989년 6월 천안문(天安門) 학살 같은 인권 탄압과 권위주의 행태에 눈감고 중국을 줄곧 옹호하는 그의 친중(親中) 성향을 지적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단적으로 닉슨 대통령은 자신의 중국 포용 정책에 대해 1994년 “내가 프랑켄슈타인(괴물)을 만든 것 같다”고 했으나, 키신저는 반성(反省) 의사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부 장관이 2018년 11월 8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CCTV
장쩌민 중국공산당 총서기가 1995년 10월 23일 미국 뉴욕 방문 중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과 오찬 자리에서 환담하고 있다.

그럼에도 키신저가 미국 국민과 세계인의 스승으로서 역할하는 모습은 긍정적입니다. 깊이있고 분석적인 저술 활동이 대표적입니다. 1979년·82년·99년에 순차적으로 낸 3권의 키신저 회고록은 세밀하고 정확한 인물· 사건 묘사와 기록으로 사료(史料)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71세에 낸 <외교(Diplomacy)>에서 “21세기에도 프러시아의 재상(宰相) 비스마르크 같은 사려깊은 정치가와 외교관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한 키신저는 88세에 발간한 608쪽 분량의 <온 차이나(On China)>에선 중국 관련 지식과 이해·대응법을 제시했습니다.

프러시아의 재상을 지낸 오토 폰 비스마르크/위키피디아

90세가 넘은 나이에 그는 <세계 질서(World Order)>, <인공지능의 시대>, <리더십>를 잇따라 냈습니다. 노년의 저술 활동은 집필을 도와주는 보좌진이 있더라도 건강과 열정·내공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1982년부터 ‘키신저 어소시에츠(Kissinger Associates)’라는 컨설팅 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키신저의 개인 재산은 5000만달러(약 650억원) 정도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세상 욕심을 초월한 그의 통찰력(洞察力)은 아직 녹슬지 않았습니다. “AI(인공지능)이 사이버·핵무기와 결합하면서 완전히 다른 통제 불가능한 세상이 열리고 있다. AI 활용이 보편화된 시대에 인류 공멸(共滅)을 막기 위해 AI에 대한 글로벌 협력과 규제 논의가 절실하다.”

콘라드 아데나워, 샤를 드골, 리처드 닉슨, 안와르 사다트, 리콴유, 마가릿 대처 등 6명의 국가 지도자를 해부한 <리더십>에서 그는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미국의 역대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들. 사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헨리 키신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브렌트 스코크로프트, 콘돌리자 라이스, 제임스 존스 지명자./조선일보DB

“서방 세계의 문화 중심이 인쇄에서 영상으로 이동하면서 철학·역사 교육과 독서가 쇠퇴하고 있다. 이로 인해 지도자에 필수적인 심층적 문해(deep literacy)가 사라지고 있다. TV와 인터넷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사려깊은 리더라면 이런 흐름에 맞서 역사적 이해를 깊게 하고, 전략을 연마하고, 인격을 개선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키신저는 사회와 인류의 장래를 진정으로 염려하는 공공 지식인(public intellectual)입니다. 고령의 석학을 예우하고 존경하는 선진 사회 풍토도 눈여겨볼만 합니다.

그나저나 헨리 키신저의 수준을 뛰어넘어 한국 최우선주의(Korea First)에 충일한 세계적 외교 전략가(戰略家)들이 우리나라에도 많았으면 합니다.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최전선에서 중국·북한·러시아 등 전체주의 세력과 맞대고 있는 대한민국이야말로 21세기 최고의 지정학(地政學)적 고민을 안고 있으니까요.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맨왼쪽)이 2005년 3월 3일 개막한 조선일보 주최 아시안 리더십 콘퍼런스에서 연설하고 있다. 마하티르 전 말레이시아 총리(가운데), 나카소네 전 일본 총리가 연설을 듣고 있다./조선일보DB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1950년 대학 졸업때 쓴 논문이 73년 만에 단행본으로 2023년 1월 출간됐다. 제목은 The Meaning of History : Reflections on Spengler,Toynbee and Kant로 똑같다./Amazon.com

※참고한 자료 (발간 연도)

Henry Kissinger, Diplomacy(1994)·On China(2011)·World Order(2014)·The Age of A.I.(2021)·Leadership(2022)

Greg Grandin, Kissinger’s Shadow(2015), Niall Ferguson, Kissinger 1923-1968, Vol.1 The Idealist(2015), Walter Isaacson, Kissinger : A Biography(2005), 강성학, 헨리 키신저(2022), Niall Ferguson, “The Meaning of Kissinger : A Realist Reconsidered” (Foreign Affairs, Sept./Oct. 2015), Thomas Meaney, “The Myth of Henry Kissinger” (The New Yorker, May 11,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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