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마라톤에 나갔을 때 여러 사람이 응원해 줘서 기분이 너무 좋았어요. 보스턴 마라톤에 나가서도 전 세계 친구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고 싶어요. 모두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배재국씨)
희소병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아들과 그를 태운 휠체어를 밀며 대회장을 누비는 아버지. 8년 전 뉴욕 마라톤 완주에 성공했던 배종훈(57)·배재국(27) 부자(父子) 마라토너가 내년 4월 또 다른 도전에 나선다. 뉴욕 마라톤, 베를린 마라톤 등과 함께 세계 6대 마라톤에 손꼽히는 보스턴 마라톤을 목표로 삼은 것이다. 배씨 부자는 지난해 11월 한 국내 대회에서 3시간 30분 38초 성적을 거둬 보스턴 마라톤 출전을 위한 기록 조건(50대 후반의 경우 3시간 35분 이내)을 달성하는 데 성공했다. 온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재국씨와 휠체어의 무게까지 종훈씨 혼자 오롯이 이겨내며 만든 기록이기에 놀라운 일이었다. 지난 3일 대전 중구의 자택에서 만난 종훈씨는 “아들의 꿈을 이뤄줄 수 있을 것 같아 기쁘다”며 “올해 기록을 더욱 앞당겨 (대회 출전자를 뽑는) 추첨에서 더 유리한 고지에 오르고 싶다”고 했다.
배씨 부자의 마라톤 도전기는 아들 재국씨의 투병기와 맞닿아 있다. 재국씨는 아홉 살 때인 2005년 전신 근육이 점차 경직되는 희소병 ‘근이영양증’ 진단을 받았다. 당시 의사들로부터 “치료 방법도 없고 기껏해야 10년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종훈씨는 “아들을 참 많이 원망하기도 했다”고 했다. 그러나 종훈씨는 무너지지 않았다. “세계에서 가장 힘이 세고 대도시가 많은 미국 대륙을 횡단하고 싶다”는 재국씨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서였다.
이때부터 부자는 국내 국토 종단과 여러 마라톤 대회에 출전하며 실력을 키웠다. 지금까지 풀코스를 뛴 마라톤 대회만 30여 회에 이른다고 했다. 그중에서도 종훈씨는 가장 기억에 남는 마라톤 대회로 처음 풀코스를 뛰었던 2013년 춘천마라톤 대회를 꼽았다. 그는 “풀코스 대회가 상상 그 이상으로 힘들더라”며 “오랜 시간 휠체어에 앉아 달리면 엉덩이를 비롯해 전신이 아플 텐데도 아프다는 말 한마디 없이 ‘파이팅’을 외치는 아들을 보며 완주할 힘을 얻었다”고 했다. 노력을 거듭한 끝에 2015년 뉴욕 마라톤 대회에 참가해 미국 땅도 처음 밟을 수 있었다. 종훈씨는 “다양한 인종이 참가한 대회에서 모든 참가자가 우리를 응원해줬다”며 “아들에게 (보스턴 마라톤에서) 또 좋은 추억을 심어주고 싶다”고 했다.
오는 26일에는 배씨 부자의 도전을 돕기 위해 동료 러너들이 주최하는 ‘2023 서울관악산트레일런대회’도 열린다. 이들 부자 마라토너와 여러 대회에서 마주치며 인연을 쌓은 1959년생 러너들의 모임 ‘59황금복도야지’가 재국씨의 레이싱 휠체어가 낡아 교체해야 한다는 소식을 듣고 교체 비용 860만원을 모으고자 대회를 연 것이다. 30㎞ 코스는 7만원, 13㎞ 코스는 5만원의 참가비를 걷는다. 재국씨가 현재 타는 휠체어는 2015년 특수 제작한 레이싱 휠체어인데, 바퀴가 닳고 재국씨도 병으로 신체 구조가 변형돼 새 휠체어가 필요하던 차였다. 모임 관계자는 “아들의 간절함을 실어 휠체어를 미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부정(父情)이 무엇인지 느낀다”며 “어떻게든 이들을 돕고 싶어 힘을 모았다”고 했다. 종훈씨는 “선뜻 이런 후원 대회를 열어줘 고마울 따름”이라고 했다.
종훈씨의 최종 목표는 ‘미주 대륙 횡단’이라는 아들의 꿈을 이뤄주는 것. 그는 “관리를 열심히 했음에도 아들의 병이 계속 진행되고 있어 걱정”이라며 “아들 건강이 더 나빠지기 전에 꿈을 이룰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대전=박정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