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당(心堂) 송상현(宋相現·81) 서울대 법대 명예교수는 우리나라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법학자이다. 미국 뉴욕대가 1994년 2월 ‘세계 최고 저명 법학자 25명’ 중 한 명으로 송 교수를 선정한 뒤 그를 250만달러 기금으로 운영하는 첫 번째 석좌(碩座)교수로 뽑은 게 한 증좌(證左)이다. 국내외 언론은 당시 “송 교수가 세계 법학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격”이라고 평가했다. ·
그로부터 9년 후인 2003년 그는 또다시 낭보(朗報)를 전해왔다. 전쟁·반(反)인도주의 범죄 관련 심판(審判)을 하는 상설 국제사법기구인 국제형사재판소(ICC·International Criminal Court) 초대 재판관에 출마해 당선된 것이다. 2009년 한국인은 물론 아시아인 최초로 ICC 2대 소장에 선임된 송 교수는 2012년 연임돼 2015년까지 6년간 재임했다.
◇세계적 법학자...아시아인 최초 국제 사법 首長
1980~90년대 서울대 교수들의 관직·정치 참여 풍조와 절연한 채 학자로서 독보적(獨步的)인 경지를 걸어온 점도 돋보인다. 송 교수는 대신 일본 법학에 사실상 중독됐던 한국 법학의 독립과 체계화, 국제화에 주력했다. 1983년 1200쪽 분량의 영문서적 <Introduction to the Law and Legal System of Korea(한국 법제도 입문)>과 <Korean Law in the Global Economy>를 발간한 것은 그 노력의 일부분이다.
송 교수는 1978년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 방문교수 시절, 한국법 영어 교재가 전무(全無)한 것을 깨닫고 귀국후 4년 동안 준비해 그의 첫 영문서적을 냈다. ICC 재판관과 재판소장 취임도 세계적 기준에서 불모지(不毛地)에 가깝던 한국 법학의 일류화를 향한 개척자적 몸부림이다.
그는 50년 넘게 노인·고아·백혈병 소아암 환자 등을 조용히 돕는 ‘사랑의 실천자’이기도 하다. 기자가 이달 6일 인터뷰차 찾아간 곳도 송 교수가 명예회장으로 있는 서울 마포의 유니세프(UNICEF)한국위원회 사무실이었다. 30여년 전 한국위원회 창립부터 유니세프 활동에 뛰어든 그는 2012년부터 9년간 무보수(無報酬)로 한국위원회 회장을 맡았다.
- 요즘 어떻게 지내는가? 매일 이곳에 나오는가?
“유니세프사무실은 일이 있을 때 가끔 나오고 평소엔 집과 개인 사무실을 오간다. 장인(丈人)인 김상협 고려대 총장께서 70세에 모든 직책을 내려놓는 것을 보고, 나도 따라하려 했으나 국제형사재판소 소장이 되는 바람에 10년 늦은 80세에 모든 자리를 그만뒀다. 유럽 비정부기구(NGO)와 독일 국제형사법연구기관 같은 곳에만 일부 관여하고 있다.”
◇“매일 오전 5시 기상...지금도 영어로 인터넷 화상회의”
- 건강은 어떤가?
“말하고, 걷고, 움직이는데 문제가 없다. 겨울에는 집 안에서 매일 3000보씩 걸었다. 특별한 운동을 하지는 않고 지금도 매일 밤 11~12시에 취침해 오전 5시 경에 일어난다. 어제는 인터넷 줌(zoom)으로 영어 화상(畫像) 국제회의를 밤 11시부터 12시30분까지 했다.”
송 교수는 3시간에 걸친 인터뷰 내내 본인이 다섯 살 때인 1945년 12월 30일 밤 벌어진 할아버지인 송진우(宋鎭禹) 선생의 암살 사건을 포함해 대학 생활과 교수 시절 제자들과의 추억까지 모든 일을 명징(明澄)하게 기억했다.
- 지금까지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나?
“조금 외롭지만 나 자신에게 엄격한 원칙을 지켜왔다. 할아버지의 참사 이후 가족 모두 ‘절대 정치는 않는다’고 맹세했다. 아버지는 담임 선생이던 장면 총리로부터 상공부 장관 제의를 받았지만 거절했다. 나도 총리, 장관, 청와대 수석비서관 등 10여차례 제의를 모두 물리쳤다. 5공화국 국무총리를 지낸 장인을 통해 총리의 실상을 너무 자세히 알아 단호할 수 있었다.”
- 삶의 지표로 삼고 있는 원칙이나 가치가 있다면?
“아마도 겸손하고, 자기 일에 열심히 최선을 다해 자신의 분야 또는 쟁점에서 세계 최고(最高)가 되는 것 그리고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온정(溫情)의 손길을 뻗치는 것 정도이다. 한 번 목표를 세우면 그 분야에서 1등이 되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남을 도울 때는 쓰고 남은 돈을 한 두푼 던져준다는 자세로 해서는 절대 안 된다.”
◇30세부터 지금까지 노인, 어린이, 고아 등 도와
- 평생 봉사 활동을 하는 특별한 계기가 있나?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1971년, 이웃 주민으로부터 ‘학벌, 집안 배경, 직업 등이 좋은 당신 같은 사람이 힘든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권고를 듣고 결심했다. 주말마다 집에서 멀지 않은 서울 돈암동 산동네 노인들을 찾아 목욕과 이발을 도와드리고 병원 등에도 모셨다. 학교는 물론 가족에도 얘기 않고 신분도 숨겼지만 3년쯤 지나니 소문이 나 ‘국회의원 나가려 쇼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때 많은 걸 깨달았다.”
송 교수는 이어 말했다.
“어린이는 유권자(有權者)가 아니니 오해를 받지 않을 듯 해 그때부터 어린이를 돕기 시작했다. 보육원에서 18세가 돼 강제퇴소되는 청소년들을 성인이 될 때까지 돌봐주는 ‘중간의 집’에서 봉사했고, 월남전 당시 한국 군인과 베트남 여성 사이에서 난 라이따이한을 위해 베트남에 직업 훈련소를 세워 자동차·TV수리 같은 기술을 가르치는 사업도 같이 했다. ‘한국백혈병 어린이재단’을 법인으로 만들어 10년 넘게 이사장을 맡았다.”
그는 “‘백혈병 어린이재단’의 경우 내가 부여받은 소명(召命)이라 여기고 했다. 전국 대학병원 소아과 의사들과 협조하면서 각계 지원과 기부금 등으로 소아암 환우(患友)와 가족들의 ‘쉼터’ 건물을 전국 10여개 대학병원 앞에 확보한 게 보람”이라고 말했다.
- 혹시 종교나 가족들 영향 때문인가?
“종교와는 관계 없다. 나는 30년 넘게 유니세프 활동을 하는 ‘유니세프 맨’이고, 아내는 30년간 한국적십자사에 몸담은 ‘적십자인’이다. 선친(先親)께서도 기부를 자주 하셨는데 외부에 절대 알려지지 않도록 주의하셨다. 장인은 적십자 총재를 지냈고, 장모님은 60년간 적십자에서 봉사했다.”
- 지금까지 기부한 금액도 상당할 것 같다.
“서울대에는 사비(私費) 7억원을 기부했다. 이 소식을 듣고 제자들이 모아준 3억원까지 합하면 10억원을 냈다.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으나 유니세프와 백혈병재단 등에도 모두 수억원 정도는 냈을 것 같다. 나는 ‘돈은 물[水]’이라고 생각한다. 돈 많이 벌 요량이었으면 교수 아닌 다른 직업을 택했을 것이다.”
◇“밤낮 휴일 없이 일한 ICC 12년은 보람있는 봉사 기회”
- 아시아인 최초로 국제형사재판소(ICC) 소장이 됐는데.
“정년 퇴임을 앞두고 앞날을 설계하던 중 충분한 자격 요건과 영어 실력을 갖춘 적임자를 찾기 힘들다는 얘기를 듣고 우연한 기회에 출마했다가 당선됐다.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보낸 12년이 가장 영예롭고 보람있는 인생의 마지막 봉사의 기회였다.”
송 교수는 2020년 발간한 회고록에서 “정의(正義)를 통한 인류의 평화와 안전의 확보에 작으나마 기여했다고 자평할 수 있겠다. 참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서 밤낮과 휴일도 없이 12년을 뛰었다. 5대양6대주를 누비면서 100명 이상의 국가원수들과 각종 정상회담을 했다”고 밝혔다.
그의 이어지는 말이다.
“으리으리한 관사(官舍)에 고액 연봉, 국가원수급 의전 같은 특혜(特惠)를 누렸을 것이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는데, 현실은 정반대였다. 2002년 창립후 회원국들의 부담금으로 예산을 세워 움직이는 ICC는 20년 넘게 연봉 체계가 그대로이다. 관사는 없어서 은행 융자를 받아 아파트를 사서 생활했다. 금전적인 측면에선 국내 보다 훨씬 손해였다.”
송 교수는 “ICC 근무시절 아찔한 순간도 경험했다”며 이렇게 밝혔다.
“외국 방문 중 밀림 속에서 반군들이 포위해 무차별 폭격을 가해오는 등 죽을뻔한 고비만 3번 정도 있었다. 아프리카 오지를 방문했다가 생각 못한 악조건에 직면했고, 리비아의 카다피 아들 재판을 위해 ICC에서 호주 여성을 포함한 4인의 변호인단을 보냈다가 전부 투옥돼 내가 목숨 걸고 리비아를 직접 찾아가 모두 구출해 헤이그로 데려온 일도 있었다.”
-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 같다.
“그렇다. 국제기구나 국제 단체의 장(長)을 맡거나 거기서 일한다는 것은 유명해지거나 돈을 많이 버는 일과 무관하다. 인류 사회를 위해 손톱 만큼이라도 봉사하고, 인류를 조금이라도 좋게 만드는데 기여한다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명성과 부귀를 구하려 하면, 일도 안 되고 자신도 불행해진다.”
◇“진지한 尹 대통령, 아주 좋은 석사논문 썼다”
- 35년동안 서울대 법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한 제자들을 키웠다. 어떻게 윤 대통령을 기억하나?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서울대 법대생들과 달리, 윤 대통령은 인문사회 분야를 열심히 파고 들어 그 분야 소양이 탄탄했다. 국내외 책들을 읽은 뒤 정리해 머리에 넣는 재주가 비상했다. 그는 또 진지한 학생이었다. 대학원 지도교수였던 나는 그가 석사학위 논문을 대충 쓸 걸로 생각했는데, 윤 대통령은 ‘집단소송(Class Action)의 대표성에 관한 연구’를 주제로 택해 ‘대표요건(要件)’에 집중해 법리적, 경제학적 측면에서 아주 좋은 논문을 썼다.”
송 교수는 “윤 대통령이 구수(九修) 끝에 사법시험에 합격한 것은 머리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관심사가 다양하고 보스 기질이 있어 동료와 후배들을 챙기느라 그랬다”고 말했다.
- 윤 대통령의 집권 후 지난 1년을 평가한다면?
“윤 대통령은 자유의 가치와 소중함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를 철저하게 신봉하는 대통령으로서 방향을 잘 잡고 있다고 본다. 윤 대통령은 최고의 학교 교육을 받았을 뿐 아니라 대학에서 교편(敎鞭)을 잡은 부모님 가정에서 정상적인 교육을 받았다.”
◇“대통령실과 정부·여당 한 마음 돼 분발해야”
- 검사(檢事)·서울대 법대 출신 등으로 윤 정부의 인재 풀이 너무 좁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윤 정부는 대한민국 건국 80여년 만에 한 번도 제대로 해본 일 없는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능력주의), 즉 뛰어난 인재들로 정부를 운영하는 시도와 실험을 하고 있다. 아무리 욕 먹어도 4년 후 ‘우리가 이만큼 해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으면 성공이다. 대통령실과 여당, 정부가 한 마음이 돼 좀 더 분발하면 가능할 것이다.”
- 최근 국회의원 등 보궐 선거 패배로 정부·여당의 국정 운영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보궐 선거에서 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오히려 자만하고 방만해지는 것을 막을 수 있게 돼 잘 된 측면도 있다고 본다. 쓴 약(藥)으로 받아들이면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될 수 있다. 그럴려면 무엇보다 더욱더 겸손(謙遜)해져야 한다.”
- 내년 4월 총선이 딱 1년 남았는데.
“윤 정부의 정책에 국민들이 표를 줄 건지, 견제 심리로 의석을 적게 줄 건지 아직 판단하기 이른 것 같다. 표(票) 떨어질 언행을 조심하고 심기일전해 노력한다면, 현명한 우리 국민들이 그렇게 모질게 하진 않을 것이다. 국민들의 감성(感性)을 헤아리며 마음을 얻어야 한다.”
- 제자인 한동훈 법무부 장관의 정계 차출설이 나오는데.
“한동훈 장관은 부부(夫婦)가 서울대 법대 제자로 내가 주례를 봤다. 그의 정계 등판설은 현재 당이나 정부가 국민 눈높이에 맞는 활동이나 업적을 못 쌓고 있다는 방증이다. 정치인들이 더 책임감 갖고 노력해 주길 바란다.”
◇“야당의 法治 훼손은 상식 벗어나...국민 공감 못 얻을 것”
- 야당이 다수당을 무기로 대통령의 대법원장 임명권 제한 같은 법치(法治) 훼손을 꾀하고 있다.
“너무 상식에 벗어나는 일들이다. 야당이 궁지에 몰렸으니 하는 짓들 아닌가. 80여년 전부터 해오던 제도를 입맛에 안 맞는다고 하루아침에 바꾸려한들 얼마나 호응하겠나. 공감을 못 얻을 것이다. 우리 국민들의 눈이 굉장히 예민해 (법치 훼손에) 날카롭게 반응할 것이다.”
- 회고록에서 “ICC 재판관·소장으로 12년간 뛰면서 단 하루도 잊은 적 없고 나에게 큰 힘과 에너지의 원천이 된 것은 나의 자랑스러운 제자들의 존재이다”라고 적었는데.
“전혀 과장이 아니다. 훌륭하고 똑똑한 제자들에게 부끄럽지 않고 모범이 되기 위해 나도 더 열심히 하고 조심하는 삶을 살았다. 내가 이상한 곳으로 가지 않은 것은 제자들 덕택이다.”
송 교수의 서울대 법대 제자들은 30여 년간 스승의 날, 연말, 설날 등에 정기 모임을 가져왔다. ‘코로나19′로 송 교수의 팔순(八旬) 회고록 출판기념회가 무산되자, 제자들은 2021년 11월 메타버스 공간에서 ‘송상현 타운’을 만들어 비대면 모임을 가졌다. 1990년대 정초에 송 교수 자택에는 500여명의 후학·제자들이 몰려와 신년 인사를 나누었다.
◇“한국 엘리트들, 겸손·개방성·국제 감각 키워야”
- ‘리더들의 멘토’로 불리는데, 우리나라 엘리트들에게 바라는 바라면?
“하버드대를 비롯해 12개 세계 일류 법과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쳐봤는데 우리나라 학생들이 제일 탁월하고 뛰어나더라.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인재들이다. 다만 좀더 겸손해야 한다. 그리고 폐쇄성을 깨고 개방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국제화 감각과 능력이 매우 부족한데 이를 보완하고 키웠으면 한다.”
- 1960년대 이후 대한민국 발전을 지켜봤는데, 아직 아쉬운 부분을 꼽는다면?
“누가 뭐라 해도 한국은 지금 선진국이다. 그런데 아직도 유학가는 졸업생들이나 정치인들을 보면 선진국에 가서 뭔가 일방적으로 배우겠다는 생각만 한다. 이래선 안된다. 이제는 후진국 멘탈리티(mentality·사고방식)를 버리고 선진국 인재들과 대등하게 주고받고 토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려면 우리가 더 준비하고 더 노력해야 한다.”
그는 “상당수 한국인은 어른처럼 커진 몸에 어린이 같은 의식(意識)을 갖고 있다. 정치인, 학자, 직장인 모두 교양있는 세계 시민이 되도록 힘써 공부하고 생각의 수준을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평생 새벽 5시 기상...부지런히 많은 일 처리”
- 29년 전 인터뷰에서 매일 새벽 5시 전에 기상한다고 했는데.
“평생 그렇다. 대학 때는 오전 4시 통행금지 해제 사이렌이 울릴 때, 아침밥을 먹고 돈암동 집을 떠나 30분간 걸어 동숭동 서울대에 도착했다. 정문 수위를 깨워 매일 아침 도서관에 1등으로 입실했다. 조용하고 맑은 상태에서 아침 3~4시간 공부하고 대학 강의를 빼먹지 않고 충실히 들었더니 대학 재학 중 고등고시 행정과와 사법과에 합격할 수 있었다.”
- 교수가 된 뒤에도 새벽 기상을 계속하는 이유라면?
“해야할 일이 너무 많아서다. 한 예로 법과대학의 경우 예전에 영어를 구사하는 교수가 없어서 강의·학생 지도 외에 국제교류 관련 일은 내가 도맡았다. 각종 학회를 만들어 내가 이끄는 단체가 많았다. 맡은 일을 제대로 하려면 새벽에 일찍 일어나 부지런해야 했다.”
- 우리나라의 앞날을 전망한다면?
“한국은 국운(國運)이 있는 나라이다. 앞뒤가 절벽 같이 꽉 막혔을 때마다 살 길이 열렸다. 숱한 위기를 슬기롭게 넘겨와 앞날도 대체로 낙관하지만 급격한 인구 감소가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본다.”
◇“명경지수 같은 마음...리더들 사명감 가져야”
- ‘100세 시대’인데 어떤 계획이 있나?
“명경지수(明鏡止水·잡념과 헛된 욕심 없이 맑고 깨끗한 마음) 같은 마음으로 살 뿐이다. 일체 욕심을 버렸다. 다음 세대에 내가 갖고 있고 성취한 걸 전해주는데 힘쓸 것이다.”
- 마지막으로 국가 원로(元老)로서 국민과 청년에 조언한다면?
“세계사의 중심 흐름은 ‘개인의 자유 확장’인데, 국내외에서 자유가 요즘 크게 위협받고 있다. 북한 김정은 집단은 인류 역사상 있어본 적 없는 개인 숭배 집단이다. 국민과 청년들이 북한의 선전·선동에 넘어가지 않길 바란다. 규칙에 기반한 자유주의국제질서를 깨려는 중국·러시아 등 전체주의 독재국가들의 도전에 맞서 리더들이 좀더 사명감, 책임감있게 대응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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