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8일 샌드위치 가게 스타라이트 델리 앞에서 단골 고객들이 주인 김정민씨에게 작별 인사 노래를 불러주고 있다. 김정민씨는 이들이 마지막 선물로 건네 준 1만 8000달러(약 2400만 원)의 성금을 손에 들고 있다./인스타그램

“당신 앞에 행복한 길이 놓여 있기를. 그때까지 늘 미소 짓고 있기를(Happy trails to you, keep smilin’ until then).”

지난달 28일(현지 시각) 미국 뉴욕 뮤지컬 중심지인 브로드웨이의 작은 샌드위치 가게 ‘스타라이트 델리(Starlite Deli)’ 앞에 수십 명의 사람이 모여 ‘떼창’하는 동영상이 인터넷에 널리 퍼졌다. 이 가게의 주인인 한국계 미국인 김정민(71)씨의 은퇴 소식을 듣고 찾아온 브로드웨이의 관계자들이었다.

40년 전 처음 뉴욕 브로드웨이에 샌드위치 가게를 연 김정민씨 부부는 하루도 빠짐없이 장사를 하며 불이 꺼지지 않는 거리를 밝혀 왔지만, 이날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게 됐다. 이날 환송회에 참석한 브로드웨이 배우 프레스턴 무이는 인스타그램에 영상을 올렸다. “이 소박한 델리가 내일 문을 닫습니다. 우리는 작은 공연을 준비하지 않고서 김씨에게 작별 인사를 도저히 할 수가 없었어요. 엄청 맛있는 샌드위치, 우리 가족을 떠올리게 하는 편안한 가게… 무엇을 더 그리워할지 모르겠네요.” 이들이 부른 노래의 제목은 ‘행복한 길(Happy Trails)’로, 석별의 정을 나누며 앞날의 행운과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겠다는 내용이다. 브로드웨이 관계자들이 공연이 끝난 늦은 밤, 이곳에 모여 요기를 하며 종종 함께 부르던 노래라고 한다.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 한가운데에서 40년 가까이 영업한 샌드위치 가게 스타라이트 델리. 지난달 28일로 영업을 마쳤다./인스타그램

현지 언론들은 이날 “뉴욕시의 또 다른 상징적인 역사가 과거 속으로 사라진다”면서 스타라이트 델리의 폐점 소식을 전했다. 이처럼 작은 가게가 뉴요커와 브로드웨이의 관계자들을 사로잡은 배경에는 오랜 시간 같은 자리에서 성실하고 친절하게 손님을 대했던 김씨와 직원들이 있었다. 김 사장의 영어 이름은 공식적으론 ‘Jung Min Kim’이지만 단골들은 그를 ‘미스터 엠(M)’ 혹은 ‘미스터 민’이라고 불렀다.

뉴욕 중심가인 타임스스퀘어 옆에 있는 브로드웨이는 꿈을 찾아 모여드는 이들로 늘 붐빈다. 화려한 뮤지컬 스타도 많지만 언젠가는 성공할 ‘그날’을 위해 새벽부터 밤까지 연습하고 공연하는 조연도 적지 않다. 스타라이트 델리는 값비싼 식당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브로드웨이 사람들의 주린 배를 달래줬다. 김씨는 1983년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오전 6시부터 오후 8시까지 문을 열고 샌드위치와 수프, 커피 등을 팔았다. 가게 이름 ‘스타라이트(Starlite)’는 별빛을 뜻하는 ‘Starlight’에서 따왔다.

뉴욕 브로드웨이의 샌드위치 가게 ‘스타라이트 델리’를 운영해온 김정민씨가 지난달 28일(현지 시각) 폐점 당일 단골들이 건넨 성금 1만8000달러(약 2400만원)가 담긴 봉투를 양손으로 꼭 쥐고 있다(왼쪽 사진). 한 단골이 여러 손님들이 적은 감사 메시지가 담긴 기념사진 액자를 전달하고 있다. /틱톡

역사가 오래되다 보니, 오랜 기간 브로드웨이에서 일했던 사람들에겐 온갖 추억이 어려 있는 장소다. 디즈니의 뮤지컬 ‘알라딘’에서 지니 역을 맡아 토니상(미국 연극·뮤지컬계의 가장 권위 있는 상) 남우조연상을 받은 제임스 먼로 아이글하트(49)는 현지 언론 인터뷰에서 “첫 공연을 마치고 왔었던 곳이다. 뉴욕에 왔다면 꼭 가야만 하는 곳”이라고 말했다.

김씨가 만든 샌드위치는 특히 무대를 설치하고 해체하는 직원들의 단체 식사 메뉴로 인기였다고 한다. 쇼가 시작하기 전 짧은 시간 동안 요기를 하고 싶은 관객들 역시 이곳을 자주 찾았다. 늘 상냥하고 성실한 김씨 부부의 가게를 찾던 단골 손님들은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아쉬움의 메시지를 남겼다. 본인이 18년간 뮤지컬 ‘위키드’에서 일한 스태프라고 밝힌 ‘마크’는 뉴욕 현지 온라인 매체인 ‘W42ST’ 인터뷰에서 “그는 우리를 먹여 살린 형제이자 친구”라고 했다.

지난달 28일 고객들이 작별 인사로 불러주는 노래를 듣고 있는 김정민씨 부부. 김정민씨는 이들이 마지막 선물로 건네 준 1만 8000달러(약 2400만 원)의 성금을 손에 들고 있고, 김정민씨의 부인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훌쩍이고 있다/인스타그램

폐점 당일 가게 앞에 모인 김씨 부부의 단골들은 노래와 함께 감사의 메시지를 담은 기념 사진과 1만8000달러(약 2400만원)의 성금을 선물로 전달했다. 앞서 온라인 모금 사이트인 고펀드미에는 김씨의 ‘퇴직금’을 위한 후원 페이지가 개설됐다. 공개된 영상에서 김씨는 “영원히 이 순간을 잊지 못할 것”이라고 소감을 전했고, 그의 아내는 연신 눈시울을 붉혔다. 두 사람은 모인 이들에게 손을 흔들며 작별을 고했다.

코로나라는 어려운 시기도 잘 견디며 성업을 이뤄 오던 김씨는 ‘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려 한다’는 개인적인 이유로 장사를 접는다고 했다. 은퇴 후에는 휴식을 취할 계획이라고 한다. 김씨는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은퇴 후에 뭘 하고 싶냐는 질문을 받자 멋쩍게 웃으며 “잠을 좀 푹 자고 싶다”는 대답을 남기기도 했다.

김씨 역시 뮤지컬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는 다수 매체에 가장 좋아하는 뮤지컬로 1975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된 ‘코러스 라인’을 꼽았다. 19명의 무명 배우가 뮤지컬의 엑스트라 역할 오디션에 참가하는 이야기로, 배우들의 열정과 불안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는 W42ST 인터뷰에서 “처음 내가 이곳에 왔을 때는 가격이 그렇게 높지 않아 많은 사람이 브로드웨이를 즐길 수 있었다. 지금은 너무 비싸졌다”고 했다.

연극 제작자인 닉 포레로는 미국 공중파 방송 CBS 인터뷰에서 “김씨는 우리 업계에서는 전설”이라며 “모두가 그를 그리워할 것”이라고 했다. CBS는 “다른 종류의 ‘브로드웨이 히트작’을 만든 한 남자가 ‘마지막 막’에 접어들자, 주변에서 사랑과 감사를 전하고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