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치혁(가운데) 전 고합 회장이 지난 5일 국립현충원을 찾아 ‘육군중위 노갑병’ 묘비에 헌화한 뒤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6·25 때 전사한 노갑병 중위는 장 전 회장의 육군종합학교 동기다. 장 전 회장 옆은 노갑병 중위의 가족과 지인.

6·25 전쟁이 터졌을 때 난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전쟁 중에 장교를 육성하는 육군종합학교에 들어갔다. 처음엔 나이가 너무 어렸다. 나이를 세살 올려 신분증을 18살이라고 고쳤다. 당시 경쟁률이 12대1이었는데 합격했다.

겨우 15살이었던 내게 전쟁은 너무나 잔인했다. 피란 갈 틈도 없이 서울은 순식간에 공산 치하에 놓였다. 숨죽이고 있었지만 인민군에 잡혀갔다. 집결해 있던 효창구장에서 구사일생 도망쳐 나왔다. 서울은 곧바로 수복됐지만 기쁨도 잠시였다. 중공군이 오산에 도달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인민군에 또다시 끌려가느니 국군 장교가 되겠노라 마음 먹었다.

임관 후 병참병과로 근무했고, 3개월 후 보병으로 전과해 육군 수송단 소속으로 속초에 배치됐다. 내 임무는 우리 요원 30여 명을 배에 태워 신포 등 북한 후방 지역에 침투시키는 것이었다. 이들을 북한 해안가까지 태우고 가면 우리 요원들은 고무보트로 갈아타고 침투했다.

어느 날 장교 한명이 오더니 작전 시간을 물었다. 별 생각 없이 내일 새벽이라고 답해줬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신포 어디쯤 요원들을 내려줬는데 공산군의 십자포화를 맞고 전멸했다. 나는 겨우 도망쳐왔다. 나중에 그 장교가 이중간첩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를 보좌했던 당번병들 중 인민군 출신도 여럿 있었다. 국군에 발을 들인 이유는 딱 한 가지였다. 밥을 좀 더 잘 준다는 거였다.

난 이렇게 전쟁터에서 10대(代)를 보냈다. 전쟁 직후 전역해 폐허에서 국가 재건에 전력 질주했다. 고려합섬을 일궈 수출에 앞장섰고, 1988년 올림픽 유치위원으로 활동했다. 2002년 월드컵 유치를 위해 힘을 보탰다.

고등학생의 눈에 비친 대한민국과 아흔이 다 되어가는 노인의 눈에 비친 대한민국 사이에는 70여 년 시차보다 훨씬 더 큰 간극이 있다. 15살 눈에는 전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과 끼니를 해결해야 한다는 절실함만이 보였다. 그럼에도 전쟁 후 암흑 천지에 비친 한 줄기 서광에 희망을 거는 담대한 도전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1953년 4월 장 전 회장이 육군 중위로 복무하던 시절 모습. /고려학술문화재단

지금 아흔인 노인의 눈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풍요로움과 세계 10대 경제 강국이라는 찬란한 조국, 그러나 선진국에 2% 정도 부족한 국민 의식이 보인다.

우선, 모든 게 너무나 당연시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요즘 시쳇말로 “나보다 먼저 간 선열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다”고 하면 ‘꼰대’ 소리를 듣는다.

국민 대부분은 ‘그냥 쉬는 날’인 현충일에 나보다 먼저 간 동기들을 위해 국립묘지에 가서 헌화한다. 지난 70여 년간 한 번도 빠짐없이 했다. 임관한 7300여 명 중 1300여 명이 전사했고, 230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들이 있었기에 내가 살아남았고, 그래서 나는 내 개인의 이익보다 대한민국 전체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며 살았다. 모두가 이 같을 필요는 없다.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의미 있는 발전을 이뤄내면 된다. 그런 사람들이 우리 사회를 지탱해주는 ‘조용한 영웅’들이다. 우리가 만든 규칙을 우리 스스로 지키는 것도 우리를 성숙하게 한다.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않고, 교통 신호를 지키고, 남에게 불편을 끼치지 않고, 음주운전을 뿌리 뽑고, 약자를 배려하고, 다름을 인정하는 국민이 선진국 국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대한민국 공무원이 회사를 차려 사적 이익을 추구했다거나 국회의원이 비윤리적 거래를 하는 모습을 보면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요즘 횡행하는 극도의 개인 이기주의, 사회 각계각층의 갈등과 분쟁, 북한 남파간첩에 대한 국민들의 무관심, 국회와 정치인들의 난장판 싸움, 빈부격차, 대기업들의 상속 인식과 사회적 기여 의식 부족 등은 7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숙제라고 생각한다.

이제 대한민국은 호국선열의 희생을 발판 삼아 더 멋있는 미래를 만들어야 한다. 아흔 다 된 노인이 해주고픈 말은 하나다.

“그동안 수고했다. 대한민국이여, 이제 웅비하라.”

☞장치혁 전 고합 회장

장치혁(91) 전 고합그룹 회장은 독립운동가 장도빈 선생의 아들로 태어났다. 1966년 고려합섬을 창업, 한때 재계 16위까지 키웠다. 평안북도 출신의 실향민이었던 그는 대북 사업에 관심을 갖고, 1990년대에 금강산 개발 사업과 러시아 천연가스 송유관의 북한 통과 사업 등을 추진했다. 1996년엔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비공개 특사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했고, 전경련에서 남북경협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