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 스위스 취리히의 ‘조력 자살(존엄사)’ 기관 디그니타스. 미 소설가 에이미 블룸(70)은 남편 브라이언의 옆에 앉아 그의 숨소리에 귀 기울였다. ‘약물’을 스스로 마신 남편의 숨소리는 고르게 변했고 이내 마지막 숨을 뱉었다. 나중에 아내 에이미는 이렇게 회고한다. “그의 존재를 느끼는 감각을 잊어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시선과 손을 그에게서 떼지 못했다. 여전히 잠들 때마다 그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남편 브라이언은 67세에 알츠하이머를 진단받고 6개월 뒤 디그니타스를 찾아 스스로 생을 놓았다. 이 과정을 함께한 아내의 회고록이 작년 미국에서 출간됐다. 책은 작년 타임지(誌)가 선정한 ‘최고의 논픽션 1위’에 올랐다. 최근 국내에 번역된 책의 제목은 ‘사랑을 담아’(원제 ‘In Love’). 미국에서 ‘조력 자살’이 옳은가에 대한 법적·윤리적 논란에 더 불을 붙였다. 남편 브라이언의 부탁으로 쓰여진 책. 자신의 조력 자살 과정을 아내에게 책으로 써달라고 부탁했다. 아내 에이미는 남편의 선택을 지지했지만 곳곳에서, 수시로 눈물이 쏟아지는 것까진 어쩌지 못한다. 에이미는 1993년 작품 활동을 시작해 4권의 소설과 5권의 단편소설집 등을 썼다.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남편과 사별 후 3년 6개월이 흐른 지난주 서면으로 만난 에이미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이듬해부터 코로나 기간 동안 손녀를 돌보면서 매일 이 책을 썼다”며 “수많은 슬픔의 순간이 있었지만, 남편이 원한 것을 성취할 수 있어 약간의 평화로운 감정도 있었다”고 했다.
50대에 사랑에 홀딱 빠져 각각 재혼해 결혼 생활을 시작했던 이들 부부의 행복은 10여 년 남짓이었다. 브라이언은 어느 순간부터 일정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고, 집중력과 방향감각을 잃었으며, 아내가 전혀 입지 않는 취향의 옷을 사들고 와 건네기도 했다.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병원에서 ‘조발성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다. 남은 기억력은 40~50% 수준이라고 했다. 회복은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래도 아직 또렷하게 의식이 남아있는 남편은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로 결심했다.
에이미는 남편의 뜻을 받아들였다. “예일대 미식축구 선수로 활동했고 건축가로 40년 일한 남편의 삶의 원칙 중 하나는 ‘좋든 나쁘든 싸움이 날 것 같으면 첫 주먹은 내가 날려야 한다’였다”며 “치매에 무방비로 당하고 싶지 않다는 게 그의 뜻이었다”고 했다. 디그니타스가 조력 자살을 허가하는 조건은 까다롭다. 불치병에 걸려 견딜 수 없는 신체적·정신적 장애가 있어야 하며, 스스로 온전한 분별력을 가지고 일관된 선택을 할 수 있는 상태여야 한다. 우울증을 진단받은 적이 있으면 안 되며, 여러 차례 전문가와 면담도 통과해야 한다. 브라이언은 우여곡절 끝에 디그니타스의 문턱을 넘어 원하는 바를 이뤘고, 에이미는 집에 돌아와 가족과 지인들을 모아 남편의 추도식을 열었다.
그는 “남편이 알츠하이머라는 불치병을 앓은 것은 깊이 유감스럽지만, 그가 죽는 때와 방식을 선택한 것을 지지했던 것만큼은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다른 이들도 조력 자살을 택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임종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있어요. 우리의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독자에게 달려있습니다.” 조력 자살이라는 선택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이별을 앞두고 드러나는 사랑과 보살핌, 주변인과의 연대 등을 통해 무엇이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지를 보여주는 책이란 독자들의 평이 많다.
에이미는 “‘왜 나에게…' 같은 원망을 한 적은 없다”고 했다. “이 세상엔 많은 슬픔과 고통이 있고, 슬픔은 우리가 사랑과 삶에 지불하는 대가라고 생각해요.” 책에는 남편이 떠나기 직전 미식축구 선수 시절 이야기를 하는데 ‘도저히 관심 있는 척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 등 익살 맞으면서도 미안함이 가득한 이야기도 담겼다. “남편이 떠난 뒤 제게 남은 것은 우리의 삶과 주위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것, 모든 것에 친절하고, 기회를 놓치지 말고 필요한 것보다 더 너그럽게 대하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