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동맹이 지원하는 대학생 평화안보연구회 회원들이 8일(현지 시각) 미국 버지니아주 윈체스터의 재향군인회관에서 한국전 참전용사회원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윈체스터=김진명 특파원

“그 당시 헬기에서 내려다본 한국은 서울이든 어디든 나무 한 그루 없이 완전히 파괴돼 있었습니다.”

8일(현지 시각) 버지니아주 윈체스터에서 만난 6·25 참전 용사 루이스 유잉(89)씨는 70년 전 기억을 어제 일처럼 떠올렸다. 1953년 한국에 파병돼 헬기 수송대에서 복무한 그가 둘러본 한반도 곳곳의 모습은 처참했다. 동석한 나스 칼리바(94)씨도 생생한 옛 기억을 떠올렸다. “한국에 배치된 첫 9개월 동안 원주에서 트럭 수송대를 지휘하면서 최전선 미군들에게 디젤유, 탄환, 식량을 가져다 주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한국의 험한 산에 어렵게 새로 낸 길로 큰 트럭을 몰고 다녔지요. 그해가 내 인생에서 제일 추운 겨울이었어요.” 그는 1951년부터 1953년까지 미 육군 소속으로 복무했다.

두 사람을 포함해 윈체스터 한국전 참전 용사 전우회에서 활동 중인 80~90대 미국 용사들은 이날 윈체스터의 재향군인회관에서 한국 손님들을 맞았다. 한미동맹재단이 후원하는 한국 대학생 평화안보연구회(U-SPECK) 소속 20대 대학생 8명이 6·25 참전 용사들을 만나기 위해 방문했다.

미 육군 소속으로 1951~1952년 인천에 배치됐던 로버트 골라이틀리(93)씨는 참전 무렵 찍은 사진과 6·25전쟁에 대한 자료 스크랩북을 들고 와 보여줬다. 그의 아내 엘모라(86)씨도 함께 앉아 대화했다. 연세대 국제관계학과 김사랑(24)씨가 “그때 한국에 와서 싸워주시지 않았다면 한국이란 나라가 없어졌을지도 모른다. 정말 감사 드린다”고 말하자 부부 얼굴의 주름이 펴졌다.

만 19세로 1952년 파병됐던 폴 캠벨(90)씨는 “나는 전쟁으로 완전히 황폐해진 한국에서 스무 살을 맞았다”면서 “자유를 지키고 공산주의와 싸울 수 있었기에 영광이었다”고 했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고,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지요. 한국에서 이렇게 우리를 기억하고 찾아와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숙명여대 인공지능공학과 이미지(20)씨는 “종전 후 70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 참전하셨던 분들을 만나 뵐 기회를 얻게 돼 기뻤다”고 했다.

이날 행사가 끝날 무렵, 참전 용사 아이작 래트럴(90)씨의 부인 다이앤(84) 여사가 “한국인들의 혼이 담긴 ‘아리랑’을 함께 부르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한국 청년들과 미국 노병들의 울림이 하나가 돼 퍼져나갔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