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0월 작지만 경이로운 성적을 올린 영화가 있었다. 장애인 소녀와 대학생의 사랑과 이별을 그린 이누도 잇신(犬童一心·63) 감독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전국 5개관에서 상영했지만 300개관을 확보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제치고 관객점유율 1위를 기록했다. 서울 종로 씨네코아극장에서는 주말 3회만 상영했는데도 전체 관객 수로도 6편 중 1등을 차지했다. 일반 영화 3분의 1 수준의 제작비 8500만엔(약 7억8000만원)으로 이뤄낸, 1000만 관객이 부럽지 않은 흥행이었다.
‘조제… ‘ 이후 20년, 이누도 감독은 영화 인생 4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다큐멘터리를 찍었다. 현대무용가 다나카 민(田中泯·78)이 2년간 포르투갈·프랑스 등 3국 33곳을 돌며 선보인 거리의 공연을 촬영한 ‘이름 없는 춤’(9일 개봉)이다. 지난달 27일 경기도 파주에서 만난 이누도 감독은 “이번 영화를 찍으며 삶에는 시간을 들여야만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있다는 점을 새삼 깨달았다”고 말했다. “오늘도 내일도 삶은 성장하는 것이고, 쌓아올리다 보면 도달하는 경지는 결국 본질이죠. 이전에는 제 영화적 기술과 센스를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는데 앞으로는 본질을 찍어 남기고 싶습니다.”
그는 환갑에 접어들며 영화를 처음 시작하던 17세 무렵을 돌아보게 됐다고 말했다. “처음엔 제가 찍고 싶은 영화를 찍었습니다. ‘조제…’도 그런 영화였죠. ‘조제…’가 성공하며 큰 제작사에서 상업 영화를 찍어달라고 요청을 많이 받았어요. 이젠 다시 제가 찍고 싶은 영화를 찍어야겠다 싶었을 때 다나카 민과 떠나게 됐습니다.”
다나카 민은 이누도 감독의 영화 ‘메종 드 히미코’(2006), 한국 영화 ‘사바하’(2019·감독 장재현)에 출연한 배우이기도 하다. 그가 포르투갈로 춤추러 간다고 하자 이누도 감독도 따라나섰다. “장편이 될지 단편이 될지, 투자도 없고 기획안도 없이 일단 촬영을 시작했습니다. 친구를 배우 삼아 8밀리 카메라로 영화 찍던 고등학생 때로 돌아간 느낌이었어요.” 다큐멘터리 영화로는 드물게 ‘이름 없는 춤’에는 인물 인터뷰가 일절 나오지 않는다. 관객 스스로 답을 찾으라는 이누도 감독의 뜻이다. 원래 영화도 춤도 인생도 정답이 없지 않습니까. 계속 두드려 보는 것이죠. 뭔가 알 듯 말 듯한 느낌을 접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는 아이맥스 영화가 각광받고 OTT가 흥하는 시대에도 영화 역시 근본적으로는 변한 게 없다고 믿는다. “에디슨이 영화를 찍던 19세기나 에이젠슈타인이 찍던 20세기나 본질적으로 아무 것도 바뀐 게 없어요. 어쩐지 굉장히 끌리는 것, 언어화할 수 없는 것들을 계속 찍으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