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부터 2017년까지 안희정 전 충남지사를 지근거리에서 수행한 문상철씨가 안 전 지사의 성폭행을 폭로한 김지은씨에게 전화를 건 날은 평창올림픽 폐막식이 열렸던 2018년 2월 25일이었다. 당시 국회에서 일하며 폐막식 준비를 하고 있던 그는 안 전 지사가 폐막식장에 오는지 물어보려고 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선배, 저 지사님께 성폭행을 당했어요. 도와주세요.”
이후 김지은씨가 2018년 3월 방송에 출연해 안 전 지사의 성폭행 사실을 폭로했다. 문씨는 당시 “안희정을 통해 세상을 바꾸고 싶었던 지난 7년여의 여정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난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고 22일 출간한 ‘몰락의 시간’에 썼다. 유력한 대권 주자였던 정치인 안희정이 성폭력 범죄로 추락한 과정을 상세히 담은 책이다. 안 전 지사의 수행비서 출신인 문씨는 스물여덟에 충남도청 비서실에서 공직을 시작해 민주당 대통령 경선 후보 수행팀장을 지냈다. 안 전 지사의 ‘미투’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김지은씨의 첫 조력자로 불렸고 검찰 측 증인으로 재판에 참석했다. 현재는 정치권을 떠나 한 기업에서 일하고 있다.
책에 따르면 ‘안희정 조직’의 문화는 1980년대 동아리 같았다고 한다. 스무 살쯤 차이 나는 선배를 형, 누나라 부르고 술자리에서 맺어진 끈끈한 관계를 중시했다. 임기 초반 안 전 지사는 전자결재를 도입하는 등 도정(道政)을 혁신했다. 도지사가 내용 파악이 안 된 상태에서 부서 책임자들의 간단한 보고만 받고 결재하던 관행을 없앴다. 홈페이지에 도의 수익·지출 내역을 실시간 공개해 투명성과 신뢰도를 높였다.
이후 점차 ‘의전’에 젖어갔다. 수행비서는 세심하면서도 ‘티 나지 않는’ 의전을 위해 고심했다고 한다. 처음 가는 행사장이라도 사전에 건물의 구조와 동선 등을 완벽하게 확인하고 도착한 뒤에는 “여러 번 와봤다는 듯” 자연스럽게 지사와 함께 이동했다. 지사가 퇴근할 때는 몇 분 뒤에 도착하는지를 공관의 경비 근무자에게 전달했고, 근무자는 대문을 열고 정자세로 경례하며 영접했다. 문씨가 안 전 지사 지시로 만든 업무 매뉴얼에는 ‘감옥에 대신 갈 정도의 무조건적 로열티(충성심)’ 같은 내용부터 커피에 시럽을 얼마나 넣는지까지 담겼다.
책에는 ‘여성 편력’이라는 제목이 붙은 챕터도 있다. 늦은 저녁 프로필 사진 촬영 일정을 취소하려던 안 전 지사가 스튜디오에 유명 여배우가 와 있다는 연락을 받고 운전기사에게 속도를 내라고 지시했다는 일화나, 언론인들을 만나는 일정 중에 여기자들과의 저녁 자리를 가장 선호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문씨는 “오래전부터 수행비서들은 서로 인수인계를 할 때 안 전 지사의 여성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외부에 알려져 문제가 되지 않도록 무조건 지켜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면서 “일을 하는 중에도 여성과 관련된 비공개 일정들이 많았지만 개인사라 생각했고 관여할 일도 아니라고 여겼다”고 썼다.
문씨는 지금 책을 내는 이유에 대해 “내가 겪은 일들이 나 혼자서만 간직할 수 있는 사유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서 “공공의 영역에서 경험한 나의 일들은 모두가 알고 함께 고민해야 할 사회의 공공재였다”고 했다. “갈등과 반목이 지배하던 정치권에 혜성처럼 나타나 통합을 외치던 정치인, 대통령 유력 후보에까지 올라 국민적 지지를 받던 정치인의 도전과 실패가 우리에게 전하는 함의를 되돌아보기 위해서다.” 그는 “가장 가까운 참모로서 파렴치한 범죄가 일어나는지조차 알아채지 못했고, 범죄가 일어난 이 거대한 권력의 성을 쌓는 데 일조했다”면서 자신을 “이 범죄를 용인한 무수히 많은 공범 중 하나”로 지칭하기도 했다. 인세 전액은 한국성폭력상담소에 기부해 피해자들의 회복을 돕는 데 쓸 계획이다.